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오신 날을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날이라 해서 사람들이 태어난 날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 역사 세계에 오신 날이기 때문이다. 만물을 만드신 분이 자기가 지은 피조물 세계에 오신 것이다.

이 기묘하고 전무후무한 사건을 인간의 이성적인 말로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여기에 예수께서 탄생하셨던 그 당시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덴마크의 신학자 킬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모하고 그리워했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을 진실하게 믿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첫째 고민이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로 만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납득시킬 수 있을까. 배우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가 안된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할까. 이것이 고민이었다.

그리고 셋째로 잘 되고 못 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넷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이 고민이었다. 물론 연구도 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다. 많은 고민 끝에 결론을 얻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 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갔다. 거기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된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익히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다. 마침내 그는 그 여인과 만나게 된다. 이윽고 그는 고백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 왔노라”고 사랑을 고백했다.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그대로 믿고 받아드려 왕궁으로 들어가 훗날 왕후가 된다.

아주 로맨틱한 이야기이다. 우리 한국의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로맨스로 받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사랑은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 비로소 사랑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지불한 사실을 확증해 준 표적이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만물을 지으셨던 그분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을 ‘인카네이션’-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의 극치이다. 이날을 일반 사람들이 태어난 생일날처럼 가볍게 알고,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고 카드주고 파티하며 즐기는데 그치는 것은 성탄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성탄절은 언제부터인가 백화점이 먼저 알려주는 성탄절로 바뀌었다. 12월만 되면 거리는 즐거워진다. 흥겨운 리듬의 캐럴과 화려한 전구들,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 할아버지가 하얀 수염에 붉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마케팅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빨간 색감의 물결과 따뜻함을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한껏 취해 버린다.

크리스찬인 우리가 먼저 성탄절의 의미를 알리고 즐거워하기도 전에 길거리와 상점들이 먼저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이제 성탄절은 모든 사람들이 한 해를 정리하며 기다리는 일반 명절이 되었다. 성탄절의 본질은 사라지고 상혼으로 점령당한 거대한 시장으로 변했다.

더욱이 크리스마스를 홀리데이로 바꾸어야 할 정도로 갈수록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기독교 문화의 현실을 보면서,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적잖이 우려가 된다.

이 기간은 아이들이 방학을 하고, 직장의 문을 닫고 모두 쉬는 사회시스템에 맞추어야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하나의 휴일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2000년 전 주님이 이 땅에 찾아오실 때 육의 향락에 도취되어 배척한 유대인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이 성탄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어지기를 기도드린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어느 선교사의 일기 내용이다. 영국에서 신학을 마치고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하루는 밀림 속에 마을을 찾아다니며 흑인들에게 전도하던 중, 감자기 숲속에서 큰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나서 덤벼들었다. 선교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했다.

“하나님, 한번만 저의 생명을 살려 주십시오. 저를 영국까지 공부시켜서 목사가 되게 하시고 아프리카로 보내실 때는 여기서 사자의 밥이 되게 하시려고 보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생명을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한참 겁에 질려서 기도하다보니, 그토록 으르렁대던 사자가 두발을 쭈그리고 앉아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하고 있었다. 선교사는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저 사자를 감동시켜 저렇게 꼼짝 못하게 하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사자는 계속 눈을 감고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교사는 저 사자도 기도할 줄 아나보다. 이렇게 서로 영감이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사자의 기도를 들어 보았다. 사자는 두 다리를 모으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오늘 아침 이렇게 맛있는 양식을 주셔서….”

이 선교사는 깜짝 놀랐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선교사는 자기 입장에서, 사자는 자기 입장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동상이몽’이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언어가 같고 혈통이 같은 단일 민족 임에도 부구하고 남과 북이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누구나 남북통일을 원하고 기도하고 있다. 남한의 사람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고 노래하며 통일을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의 노래를 똑같이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통일은 적화통일이다. 남한의 땅까지 공산화 시켜서 김정일 일당을 배부르게 하고, 백성을 굶주려 죽게 만드는 북한과 같은 비참한 지경을 만들어 보겠다는 심보에서 통일을 소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동상이몽’이란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안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가정에서도 생기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된다. 부모가 함께 살면서도 서로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다. 한 집에 살면서도 가족끼리 서로 대화가 없거나 의사소통이 안 되면 건강한 가정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래전 미국 교포사회에서 teenager 학생 하나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교포들에게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남겨놓은 편지 한통의 내용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정말 필요했던 것은 달러가 아닙니다. BMW 고급자동차가 아닙니다. 제게 필요했던 것은 내가 고뇌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필요했습니다. 내가 고통하고 있을 때 필요했던 것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줄 어머님이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필요한 이 시간에도 아버지, 어머니는 내 곁에 없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유행하는 옷이 아닙니다. 엄마 아빠의 그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그립습니다.”

부모들이여! 이 자녀들의 절규를 듣고 있는가? 세상에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그 부모들이 자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사람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가 부를 추구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뛰고 일하는 동안 우리의 자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바라고 기대했던 자녀들이 10년, 20년 후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아로 등장한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자녀는 가정의 미래이다. 자녀는 가정의 최대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이 지닌 최대의 보물은 바로 자녀들이다. 자녀는 부모의 프라이드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아름답고 바른 자녀들이 자라고 있는 가정, 그들은 그들의 사회 속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한다. 자녀는 바로 우리 가정의 미래요, 교회의 미래요, 국가의 미래요, 세계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 가운데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엄숙하고 중요한 책임은 없다. 가정에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해결하면서 동상동몽(同床同夢)이 되도록 하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일반적으로 “빈익빈 부익부”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약점으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양극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겠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이처럼 양극화의 현상이 왜 생겨나는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은 그 결과에만 관심을 집중하기에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이론에 속는 잘못을 범한다.

오래전 필자는 중국이 개방되자 바로 중국에 간 적이 있다. 북경의 한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려고 했더니 점원들이 귀찮게 대하는 것을 겪어본 일이 있다. 그들은 누구나 정부에서 지급되는 봉급을 받고 일하는 공무원들이어서 구태여 악착같이 물건을 팔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를 빈곤하게 만드는 공산주의의 허점이라 하겠다.

사람은 본래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인간으로 지음 받았다.(창 2:15, 3:19) 사람이 정령 낙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불한당(不汗黨)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땀 흘리지 않고 요행을 바라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느 분이 말했다. “사람이란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하면 착한 마음이 생기고 안일(安逸)하면 교만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구약성경에 전도자는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라” 하였다.(전 9:10)

인생이 살아 있을 때가 일할 때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발명왕 에디슨은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것 외에 대안(代案)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천재적 영감을 칭송받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천재란 99%가 땀이며 1%가 영감이다” 이 말은 노력이 인간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기 속에 실패를 소원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어느 누가 실패를 소원하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실패를 소원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데 비해 실패하는 사람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보면서 무의식중에 실패의 자리로 향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그저 쉽게 재수가 좋아서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 성공 배후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피눈물 나는 노력과 인내의 삶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토벤이 어떻게 음악의 대가(大家)가 되었는가? 그의 생가에는 그가 아끼던 피아노가 있는데 특이한 것은 그 피아노의 건반들이 음푹음푹 패여져 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피아노의 건반을 두들기며 땀 흘리는 연습을 반복하였는가를 입증해 준다. 참으로 천재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동등한 입장에서 출생한다. 그러나 어떻게 성장했느냐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생겨난다.

이 원리는 꼭 경제분야에서만 적용시킬 문제는 아니다. 우리 교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필자는 그동안 세계 여러 교회를 다니며 부흥하는 교회와 침체 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 살펴보았다.

잘되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은 한결같이 열정이 있다. 찬송에 힘이 있다. 템포가 빠르다. 예배진행이 처지지 않고 약간 빠르고, 교회 내부가 밝고, 성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목회자가 자신감을 가지고 목회한다. 그런 교회는 뜨겁고 부흥한다.

그러나 침체되어 있는 교회는 분위기조차 어둡고 답답할 정도로 모든 것이 느리고, 찬송에 힘이 없다. 그리고 성도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다. 매사에 무관심 속에 마지못해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여할 뿐이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 노인이 되었지만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 교회는 항상 새로워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생기가 넘쳐야 한다. 빈익빈 부익부의 원리를 교회의 부흥과 침체의 양극화에 한번 적용시켜서, 영적으로 진단하여 빈익빈에 해당되는 것들을 얼른 제거하고 무릇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족하게 되는 쪽으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부흥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29)

개와 사람

칼럼/목회칼럼 | 2009/10/27 16:10 |

얼마 전 길을 가다가 개를 안고 지나가던 젊은 한국 여성이 개를 길가에 놓으면서 “잠시 여기서 기다려, 엄마가 잠깐 가게 들어갔다 올게!”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아연실색했다. 어떻게 개를 낳아서 개의 엄마가 되었다는 것일까? 아마도 개를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개의 엄마라고 했으리라 이해는 간다.

요즘 아이들이 개를 너무 좋아한다. 개를 쓰다듬어 주며 개를 안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을 자주 만난다. 어느 집에서는 개를 원하는 자녀들 때문에 개를 집안에서 키우고 개와 함께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개를 소파(sofa)에 앉히고 손님과 이야기하는 그런 가정이 늘어난다.

아침에 조깅하려고 길을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개를 찾고 있는 쪽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을 본다. 개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고, 크기는 어느 정도이고… 이 개를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보상을 하겠노라고 하는 광고문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또한 길을 걷다 보면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들도 많다. 혹시 물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살피며 걸어야 한다. 어떤 개는 매우 공격적인 것도 있다. 하지만 주인은 풀어놓고 사람을 물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사람보다는 자기의 개가 더 중요하다는 자세이다. 미국이나 호주나 서구인들은 개를 자기의 가족 수준으로 생각한다. 이른바 이민자의 인권(human rights)보다는 그들의 견권(doggie rights)를 훨씬 더 존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미국 뉴죠지에서는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한 맹견에게 법정이 사형언도를 내린 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개의 주인이 유명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싸운 결과 결국 최종판결에서 그 개는 타 주로 추방 명령을 받아 목숨을 유지하고, 주인과 함께 타지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하니 어쨌든 개도 인간같이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세상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어느 교회 목사는 개에게 세례를 주는가 하면, 어느 신학교에서는 개에게 신학박사 학위까지 준다고 하니, 이제는 교회마저도 개판이 되어버렸나 보다. 뉴욕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 롱아이랜드 지역이 있다. 나는 오래전 그 지역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지역에 ‘개를 위한 묘지’가 있다. 개를 위한 장의사도 있고, 어떤 묘 앞에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 ‘관’도 종류가 많은데, 어떤 것은 금장식이 있는 만 불 이상의 ‘관’도 있단다. 사람을 위한 관보다 훨씬 비싼 것이다.

어느 목사님의 목격담을 들어보면, 개를 위한 장례식에 목사가 집례를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집례 목사가 유족들을 위로 하면서 “장차 천국에 가면 이 개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단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말이다.

그 목사는 개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든지, 아니면 개의 주인이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유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 눈치 살피고, 사람 비위 맞추는 숙맥 목사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개가 아무리 영리하고 사랑스러워도 개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개를 좋아하고 개의 등급을 높일까? 하기는 옛날부터 사람과 개를 비교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개 팔자 상 팔자” 사람이 개만도 못할까? 사람이 개보다 뒤에 가면 “개만도 못한 놈” 개보다 앞서가면 “개보다 더한 놈” 개하고 같이 가면 “개 같은 놈” 왜 이런 말이 생겨났을까?

생각해 보면 이 시대에 개들이 높임을 받고 사람보다 대접을 더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믿을 수 없어도 개는 믿을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용돈을 주면 마약을 사먹는 외아들이 돈을 안 준다고 야구방망이로 어머니 머리를 후려갈겨 죽인 천인공노할 자식을 무엇으로 말할꼬.

조강지처(糟糠之妻)란 말은 가난하여 조를 먹고 강냉이를 먹으며 고생을 함께한 최초의 아내를 일컫는 말인데, 먹고 살만하니 조강지처를 버리고 딴 여자를 데리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 이런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하여 말할꼬.

이민 와서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딱하게 생각하여, 잠을 재우고 먹이고 기술을 가르쳐 제법 자리를 잡혀 주었더니, 오히려 욕하고 배신하고 돌아서니 참으로 “개만도 못한 놈”이런 말이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세상에 믿을 X 하나도 없으니, 요즘 개하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가 보다. 사실 인간이 개만도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물질문명이 사람을 개만도 못하게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오늘 이 시대는 개들에게 물리지 않도록 조심할 수밖에 없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行惡)하는 자들을 삼가라.”(빌 3:2)

지구의 재난

칼럼/목회칼럼 | 2009/10/12 15:40 |

지난 며칠 동안 매스컴을 통해 보도된 이 지구상의 재난이 연속되고 있는 사실에 우리 모두 마음 졸이며 영상에 나타난 피해지역의 현상을 목격했다. 생전 처음 겪은 황사 재앙으로 시드니 일대는 세상 끝날이 왔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 30도의 더위에서 15도 이하의 추위로 떨어지는 이상기온을 겪으며, 여기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피지섬에 쓰나미로 말미암아 많은 희생자들이 생기고, 가옥들의 파괴로 수많은 이재민이 생겼다고 하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쓰나미”(Tsunami), 요즘 들어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지진해일”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본에서 지진해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 이 일본 말이 세계에 공식용어가 되었다고 한다. “쓰나미”(津波)는 이제 지구촌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그 위력이 대단하다.

이 초강력 해일지진이 일어나는 곳에 사망자가 수십만 명이 넘고, 이재민도 수백만 명에 달하며, 어떤 때는 한 부락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무서운 재난이다. 또한 생존자도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과 전염병 때문에 더 많은 피해를 입는다고 하니 참으로 그 위력이 대단하다.

또한 매스컴은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강도 높은 지진으로 인해 수천 명의 사망자가 생기고, 수백만의 이재민이 한지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보도한다. 그런가 하면 필리핀에서는 홍수로 가옥들이 침수되고 많은 수재민이 생겨났다고 보도한다. 그리고 대만에도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며, 일본에서는 강한 태풍으로 집들이 날아가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가운데서는 이런 세계적인 위기를 본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물도 엄청나게 부족하여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물 문제를 겪고 있다고 한다. 지금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서 웅덩이의 썩은 물을 마시고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그 이상 심각한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이곳 호주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지만 중앙의 내륙지역에는 이미 사막화가 되어 버렸고, 농촌에는 물이 없어서 농사를 포기해야 하는 상태라고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 토양침식이 심해져서 곡물 생산량도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고 지구의 온난화는 밀, 쌀, 옥수수 수확도 힘들게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것을 극복할만한 뾰족한 묘책이 없다는 것이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 위원회 발표에 의하면 앞으로 6년 이내 즉, 2015년을 기준으로 현재 300인 지구 온난화 지수를 최고 500 이내로 묶어두지 아니하면, 그래서 700지수를 넘기면 앞으로 30년 후부터 20억 명이 물 부족으로 시달리고 지구상의 생물 30%가 멸종한다는 것이다.

지진은 세계적으로 파생하고 있다. 지구는 열병에 걸려서 지구촌은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물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지금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강도나 빈도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세계 연감과 기록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일어난 지진은 그전의 것보다 두 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진의 숫자는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그 강세를 높이고 있다.

2009년 현재에는 8.0의 강도 높은 지진이 세계 각 곳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서 수많은 인명의 피해와 재산의 피해를 속출하고 있다.

이러한 재난들이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밝혀준다. 그의 고백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연한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알고 계시며 그 결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 어거스틴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구상의 재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지구상의 재앙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경륜과 섭리 가운데 발생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런 재난의 시대에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알아야 한다. 그저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오실 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징조를 깨닫고 기름(믿음) 준비를 잘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눅 13:3-5)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익빈 부익부의 원리 - 시드니 중앙 장로교회 원로목사 홍관표  (0) 2009/11/13
개와 사람  (0) 2009/10/27
지구의 재난  (0) 2009/10/12
말세의 징조  (0) 2009/09/30
나그네 인생  (0) 2009/09/14
절제의 생활  (0) 2009/09/01

말세의 징조

칼럼/목회칼럼 | 2009/09/30 13:37 |

지난 23일(수요일), 나는 일상생활의 관습에 따라 아침 일찍 기도하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세상은 온통 붉어 있었다. 혹시 어느 곳에 불이 나지 않았나 살펴보았으나 화재가 난 곳도 없었다. 그저 전부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천기(天氣)의 이상 기온에서 나타난 현상인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때에 징조를 보여주신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다. 우리는 그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으나 그날이 가까웠다는 사인을 보고 느낄 수 있어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할 수가 있으리라.

날이 밝아져도 여전히 햇빛은 나타나지 않은 채 계속 공간 전체가 붉은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곳 방송에 긴급뉴스가 나왔다. “Dust Storm”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호주 중앙지역에 있는 붉은 모래를 돌풍이 가지고 와서 시드니 전역을 덮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황사현상은 호주 역사상 최악의 천재(天災)라고 하는데, 나도 세상을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이튿날 아침 학교 강의 때문에 일찍 길가에 나섰더니, 자동차들이 마치 멀리서 진흙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것처럼 붉은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마치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내가 어릴 때와 오늘의 세상을 대조해 보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달라지고, 사고방식도 달라지고, 가치관도 달라지고, 생활방식도 달라졌다.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예배형태도 달라졌다. 따라서 요즘 전에 볼 수 없었던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과연 이런 것들이 발전하는 모습인가, 아니면 세상 종말(Final goal)로 가는 것일까?

지금 인류는 최첨단의 과학을 기초로 한 현대문명을 이루고 있다. 참으로 자랑할만한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놓았다. 그러나 한편 사람들의 지식과 기술은 최고도로 발달하고 그 힘이 놀라울 정도이지만, 그런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해낼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신종 병들이 생겨나서 사람들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지금 AIDS 병은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보다 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또한 “광우병”, “조류독감”, 근간에는 공기로 전염되는 “신종 인플루엔자”로 세계가 비상에 걸려 있다. 이런 병들이 과거에는 없었고 들어보지도 못한 병들이다.

요즘 세계 각 나라의 정상들이 모여 환경보호를 위한 공동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그 정도로 지구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셈이다. 날로 심각해져 가는 대기오염, 스모그현상, 강물오염, 또 흙 속에 침투되고 있는 여러 화학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 더 이상 생물들을 배태할 수 없게 되는 오염된 땅과 강물 그리고 산천마다 넘쳐 흐르는 오염된 쓰레기들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 산비탈을 뛰어놀다가 나무 밑에 바위옷이라고 하는 파란 이끼가 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대기가 깨끗하고 신선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요즘은 물과 공기와 음식물이 오염되어 마음 놓고 마시고 먹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요즘 호흡기 질환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호흡기 질환이 왜 생길까? 오염된 물과 공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염된 음식을 먹음으로 각종 병균을 유발한다.

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강도 높은 지진과 가뭄과 기근 현상들은 놀랍게도 성경의 마지막 때의 징조와 다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징조들은 우리가 눈감고 있는 순간에 우리 앞에 큰 문제로 성큼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였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이 세상 마지막에 다시 오는 재림을 믿는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이 “안전하다. 평안하다”하며 무관심하고 있을 때,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말세에 대한 징조는 알려 주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예언하기를 “처처에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하셨다. 누가복음에는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신종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하였다.

다만 궁극적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깨여있으라”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이며, 정신을 차리고 주님 오실 때 부끄럼이 없도록 자신을 세워나갈 때임을 명심하며 살아야겠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 (계 6:12)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와 사람  (0) 2009/10/27
지구의 재난  (0) 2009/10/12
말세의 징조  (0) 2009/09/30
나그네 인생  (0) 2009/09/14
절제의 생활  (0) 2009/09/01
해방과 자유  (0) 2009/08/17

나그네 인생

칼럼/목회칼럼 | 2009/09/14 13:18 |

요즘 우리 주변에 가깝게 지나던 분들 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정답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하던 분들이 세상을 떠나 유명을 달리한다. 참으로 인생은 나그네임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된다.

옛날 방랑시인 김삿갓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김삿갓이 전국에 순회하면서 시를 쓰고 돌아다니던 어느 날 해가 저물어 한 동네를 찾았는데 그 동네에 가장 큰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장, 하룻밤 여기에서 쉬고 갑시다.” “이 집은 여관이 아니요. 저기 주막집 하나가 있으니 거기서 쉬어 가시오.” “당신은 이 집에 몇 년이나 살았소?” “우리 집은 대대로 여기서 16대가 살았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돌아가셨지요” “그렇다면 어차피 누구나 잠깐 머물다 가는 집이군요. 그러니 여관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룻밤을 묵든 묵었다가 떠나기는 마찬가지인데 나도 하룻밤 묵고 갑시다.” 이렇게 해서 그 집에서 쉬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 내 집은 내가 잠깐 머물다 가는 여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마치 영원하게라도 살 것처럼 집착들을 한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날이 갈수록 쭈그러드는 고물인데 집은 점점 더 크게 짓고 야단스럽게 살려고 한다. 돈 모으는 재미에 몰두하다 보니 점점 더 욕심이 생겨서 돈의 노예가 되고 만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혜롭게 살려고 하면 인생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를 일생(一生)이라고 한다. 세상 일에는 연습이 있지만 삶에는 연습이 없다. 이대로 종말이고 단 한 번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이대로 처음이요 순간순간 마지막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는 날은 짧다. 우리의 생을 돌아보면 허무하고 짧은 인생임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느껴야 한다. 인생은 나그네이다. 나그네라는 말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을 말한다. 집을 떠나 잠시 타향에 거주하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잠시 동안 머무를 땅이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다음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나의 나 됨의 현주소, 나의 나 됨의 본질을 먼저 생각한다.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무를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의 나이를 아는 것이다. 나이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이다. 시편 90편 12절에 모세는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드렸다. 세상에 제 나이를 셀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실상 제 나이를 바로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하다. 젊은이가 늙은 척 하는 것도 건방지고,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척 하는 것도 주책이다. 이래서 자신의 나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영원한 것과 임시적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는 어떻게 될까 곧, 마지막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대로 살면 내 운명은 어떻게 귀착할까, 곧, 종착점, Final goal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공원 청소부는 황혼이 깃들기 전에 서둘러서 청소를 마치기 위해 벤치에 앉아있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다. 그때 그 사람은 “글쎄요.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청소부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그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그것을 알았으면 벌써 여기를 떠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이다. 그는 늘 생각 속에 인생의 고뇌가 서려 있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인생은 모두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돌아갈 고향이 있다.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귀성객이라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그네인 우리 모두는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들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하여 인구의 이동이 계속되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 11:16)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의 재난  (0) 2009/10/12
말세의 징조  (0) 2009/09/30
나그네 인생  (0) 2009/09/14
절제의 생활  (0) 2009/09/01
해방과 자유  (0) 2009/08/17
북한 선교에 대한 소고(小考)  (0) 2009/08/05

절제의 생활

칼럼/목회칼럼 | 2009/09/01 15:48 |

오래전의 일이다. 내가 호주에 와서 처음 학생 청년들을 데리고 수련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시드니 남서쪽 캔버라로 가는 도중에 어느 자그마한 마을인 것 같다. 천주교의 수녀들이 생활하는 수양관인듯하다. 거기에서 우리 청년 학생들과 함께 며칠을 지내며 수련회를 하고 있었다.

아침식사에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빵과 우유, 그리고 약간의 튀김 감자가 나왔다. 우리는 우선 식사기도를 하고 각자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접시에 빵을 가져다가 버터와 쨈을 바르고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아침 당번이 먹고 난 그릇을 씻기 전에 먹던 빵과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넣고 청소를 했다. 나는 이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라 그런 일을 자연스럽게 잘한다 생각하며 대견스럽게 보았다.

우리 아이들이 깨끗이 정리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간 후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는데 수녀들이 쓰레기통에서 우리 아이들이 먹다 버린 빵조각을 끄집어내서 그것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한편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I’m sorry”라고 사과를 드렸다. 그랬더니 우리 아이들이 채 먹지않고 입자리를 내고 버린 그 빵들을 꺼내 먹으며 나에게 말했다. “당신네 Korean은 그렇게 부자냐? 왜 먹는 빵을 이렇게 버리느냐?”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너무 창피스러움을 느끼면서 서툰 영어로 변명을 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학생들이 이곳 음식에 익숙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더 따끔한 말로 항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 이해하지만, 왜 먹는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느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먹을 것이고,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은 짐승에게 먹일 것이고, 짐승이 못 먹을 것은 꽃과 나무에 주면 될 것인데, 왜 먹을 것을 쓰레기통에 넣어서 버리게 하느냐?”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항의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때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후 나는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절대고 먹고 남은 것을 쓰레기통에 넣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만, 우리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좀처럼 안된다.

정말 호주인들의 절제생활, 이 한 가지는 배워야 하지 않을까? 좀 어둡게 살아도 답답할 정도로 전기를 아끼고, 물을 아끼고,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분들의 삶을 우리가 여기서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분들이 없어서가 아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삶이 그들 생활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 한국의 교회 집회가 약속되어 며칠씩 한국에 머무는 때가 있다. 흔히 생활화된 사우나장에 가서 몸을 풀 때가 더러 있다. 그런데 사우나장에 들어서면 무진장의 물이 쏟아져 나간다. 사람도 없는데 샤워하는 곳에 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잠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우나장이 한두 곳도 아닌데 이렇게 물을 낭비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아닌게아니라 물을 아껴 써야 국민 전체의 생계가 유지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한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면서도 사치와 낭비는 여전하다. 깨끗하게 살아야 하지만 사치는 금물이다. 우리 삶에 절제가 꼭 필요하다.

절제의 반대말을 중독이다. 중독은 어떤 것에 대해 절제하지 못할 때 나타난다. 절제하지 못함으로 여러 가지 중독에 걸린다. 인터넷 중독,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등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용도 이상의 주류를 과량으로 계속 마심으로 신체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 풍기를 해치게 된다. 술로 인해서 삶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 술을 끊지 못하고 계속해서 마시게 되는 시발점도 절제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내가 목회하는 동안 절제하지 못함으로 장래성을 바라보았던 젊은이들이 폐인이 되어 버리거나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모든 본능과 감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 억제해야 한다. 절제가 없는 사람은 마치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과 같아서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 아무리 자동차가 좋아도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 그 차는 결국엔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제를 생활화해야 한다. 감정이 나는 대로 다 나타내고 살면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성령의 열매 중에 마지막 열매가 절제이다. 그것은 가치성에 따라 마지막이 아니라 모든 열매의 결론인 것이다. 사랑이 아무리 귀하지만 절제가 없으면 문제가 생긴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으로 행복을 원하는가? 절제? 아니면 중독자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지금이 바로 절제해야 할 때인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세의 징조  (0) 2009/09/30
나그네 인생  (0) 2009/09/14
절제의 생활  (0) 2009/09/01
해방과 자유  (0) 2009/08/17
북한 선교에 대한 소고(小考)  (0) 2009/08/05
천하보다 귀한 생명  (0) 2009/07/22

해방과 자유

칼럼/목회칼럼 | 2009/08/17 14:37 |

해마다 8월이 되면 그 옛날 쓰라렸던 아픔의 통증들이 기억되고 되살아나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생각하면 할수록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의 역사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 어느 민족에게나 잊을 수 없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에게는 1월 4일 유월절이 있고, 중국인들에게는 10월 10일 쌍십절이 있고, 미국인들에게는 7월 4일 독립기념일이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8월 15일 광복절이 있다. 이날은 세계사에도 기억될 만큼 우리들이 겪은 36년간의 고통은 가장 큰 시련의 역사이다.

일본이 대만을 점령해서 50년간이나 통치했지만, 오늘 그들 국민의 감정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필리핀도 점령했지만, 그들 국민의 감정도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에게 대했던 것처럼 악랄하게 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유독 우리 민족에게만 한을 심어 놓았다. 일본은 한국과 완전히 합방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을 말살시킬 계획을 가지고 가장 잔인한 역사로 36년간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1910년 그해는 조용하게 살던 아침의 나라, 일찍이 남의 나라를 침략해본 일이 없는 순진한 민족, 평온하게만 살던 우리 민족의 안마당에 강도처럼 들이닥친 비극의 해였다.

그들은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소위 황민정책을 세워서 황국시민 서사를 만들어 암송시켰다. 그리고 말을 뺏고 일본어를 국어도 대치시켰다. 공석에서는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엄금시켰다. 심지어 조상이 준 성(姓)도 바꾸게 하고 이름도 개명하도록 하였다.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냈고, 근로보국대라는 조직체를 만들어서 장정들을 군수공장으로 광산으로 끌어내어 강제노동을 시켰다. 애국지사는 끌어내어 옥에 가두고, 생각이 있는 지식인은 모두 감시를 받아야 했다.

한국의 기독교에는 신사참배라는 무거운 십자가가 메워졌고,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세계나라들이 한참 발전되어가던 36년간, 우리는 손발이 묶인 채 꼼짝 못하고 한숨으로 지새워야 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의 날이 왔다. 일본이 쫓겨갔고 옥문이 열리고 애국지사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자유인이 되었고, 빼앗겼던 이름도 되찾았고 잃어버렸던 말도 찾았고, 전쟁터로 광산으로 끌려갔던 젊은이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되돌아왔다. 드디어 우리에게 광복이 온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감격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그 후 64년의 세월이 흘렀다. 64년 동안 우리 조국은 장족의 발전을 보았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축복을 받아 세계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6.25사변으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나라가 이제는 수출대국으로 공업국으로 성장했다. 우리 한국교회도 크게 부흥 성장하여 세계 선교에 앞장서는 선교국이 되었다. 이처럼 외형적으로 발전한 우리 민족이 과연 바람직한 오늘을 살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진단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바로 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해방 후 좀 발전되고 살게 되었다고 해서 방종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향락 풍조는 솔직히 바람직한 삶이라고 볼 수는 없다. 향락은 모두의 정신과 생활을 병들게 하고 좀먹게 하는 병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 좀 살게 되었다고 값비싼 명품을 소유해야 하고, 이태리 상아 침대에 누워야 잠이 잘 오고, 수억의 혼수를 보내야만 체면이 선단 말인가?

미래학자 스펭글러(Spengler)는 ‘서양의 몰락’이란 책에서 장차 서구의 문명은 암담하게 될 것이고, 그 패망의 원인은 외적인 침입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부패와 영적인 타락으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마가 그렇게 망했다. 고대 폼페이시가 그렇게 망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다.

우리는 과거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과거의 쓰라림을 되새기며 오늘을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64번째 광복절을 하나의 행사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방종해서는 안된다. 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사치하고 남용해서는 안된다. 근검절약하며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지 않는 성숙된 민족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그네 인생  (0) 2009/09/14
절제의 생활  (0) 2009/09/01
해방과 자유  (0) 2009/08/17
북한 선교에 대한 소고(小考)  (0) 2009/08/05
천하보다 귀한 생명  (0) 2009/07/22
6.25와 공산주의  (0) 2009/07/08

세계 어디를 가든지 북한에 대한 선교가 논의되면 반드시 양론의 주장이 나타난다. “절대로 북한은 선교할 곳이 못 된다” “그래도 해야 된다” 안된다는 쪽은 주로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북한의 공산주의 사회를 겪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철저하게 교회를 박해하는 북한땅에서 복음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혹시 물질을 지원한다 해도 그것은 공산정권을 돕는 이적행위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을 돕는 사업은 “퍼주기이다”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확산되고, 이것이 결국 핵폭탄을 만들어 내게 하여 우리를 겨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만은 이 모든 일반적인 상황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곧 선교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선교에는 국경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문을 굳게 닫고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는 곳이라도 모든 민족에게 땅끝까지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과 우리의 사명이 있다.

하물며 우리의 땅이면서 같은 동족인 북녘땅의 형제, 자매를 제외할 수 있을까? 물론 무신론 사상으로 무장된 공산주의 정권의 지배를 받고 “예수”의 “예”자만 말해도 목숨이 위태로운 곳이라 전혀 복음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우리 기독교 선교차원에서 그들도 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야 할 우리의 형제, 자매인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사탄이 사로잡고 있는 공산주의는 용납할 수 없지만, 공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명령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곳 시드니 교역자 협의회는 전교회적으로 북한의 형제, 자매들에게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하여 북한 선교위원회(손아브라함 목사)를 구성하고, 구체적으로 진행해왔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결핵환자를 대상으로 결핵 퇴치를 위해 수십 년간 일해온 유진벨 재단을 통해 검진차량을 한 대 구입하여 인계했고, 지금은 그 차량의 의료기구를 갖추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이번 달에 유진벨 재단 이사장이신 인세반 박사 내외분이 호주를 방문한다고 한다. 우리 시드니뿐만 아니라 호주 전역에 거주하는 교민 모두가 결핵퇴치를 위한 대북지원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유진벨의 “북한사랑”을 본받고 함께 동참해야 할 것이다.

유진벨은 1895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유진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 그의 4대손인 스테반 린든(인세반) 박사에 의해 미국과 한국에 설립된 비영리 대북지원 민간단체이다. 지원 초기에는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식물을 보냈으나, 1997년 북한 보건성으로부터 결핵퇴치 지원을 공식 인증받아 지금까지 북한 전역에 22만여 명분의 결핵약과 의료품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북한의 시 군 구역의 인민 병원에서 외부지원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결핵병원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후원자의 이름으로 또는 지원하는 교회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진벨은 후원자의 심부름꾼으로서 모든 물품을 후원자의 이름으로 전달되고 있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기독교의 본질은 영혼 구원과 이웃사랑 실천으로서 북한도 엄연한 선교의 대상이요 내 동족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가르치면서, 이웃사랑의 귀중함을 역설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북한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6자 회담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남북 간의 관계개선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은 이런 일반 논리에 얽매이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 인과 같이 희생과 사랑의 손을 펴야 할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싸매주고 치료해주는 사랑이 전달될 때,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게 될 것이고, 설마 그렇게 안되어도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 주님이 보실 때 얼마나 흐뭇해하실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마 25:35-40) 병들고, 옥에 갇히고, 헐벗고, 굶주리고, 나그네 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돌보는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제의 생활  (0) 2009/09/01
해방과 자유  (0) 2009/08/17
북한 선교에 대한 소고(小考)  (0) 2009/08/05
천하보다 귀한 생명  (0) 2009/07/22
6.25와 공산주의  (0) 2009/07/08
돈의 철학  (0) 2009/06/24

최근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대단히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곳 타스마니아 섬보다도 훨씬 작은 조그마한 땅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이성을 잃은 북한 공산 정권은 핵실험에 미사일까지 발사하면서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조국은 북한의 협박이나 어떠한 외부세력보다도 사회 내부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것 같다. 우리 조국의 문화는 선진 조국이 아니라 그 옛날 수천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사회의 무질서와 성적타락으로 이혼율이 상승하고, 극심한 대립과 부정부패, 부정식품, 심지어 부정약품까지 무엇하나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불안한 사회가 되어가는 형편이다. 인터넷 강국이라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닌 것 같다.

최근 나오는 통계를 보면 교통사고 제1위, 자살률 세계 제1위, 참으로 부끄러운 1위이다. 물론 스포츠나 기술 면에서 우리의 뛰어난 기능을 자랑할 만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긍지와 끈기를 심어 주어야 할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심지어 종교인까지 지도급 인사들이 삶을 포기하고 생을 끝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실망스럽기만 하다.

얼마 전에는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고 다스리던 전직 대통령까지 유서 한 장 써놓고 자살해 버렸으니 “강인한 한국인”이란 말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래도 정부에서는 전직 대통령 예우한다는 차원에서 일만 송이 장미꽃으로 빈소를 화려하게 꾸며 놓고 국민장을 성대히 거행하며, 자살자를 위대한 순국열사로 미화시켜 철없는 사람을 뒤이어 모방자살케 하는 그런 과실은 우리의 장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모 여대생은 “나도 노 대통령을 따라갈래”하고 유서를 써 놓고 자살하는가 하면, 모방 자살이 줄지어 발생하고 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되찾아서 살고 살리는 사회풍토가 되었으면 한다. 더 이상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학습효과가 아니기를 바란다.

삶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축복이며 죽음은 죄의 삯이며 사탄의 무기이다.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생명을 살해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향배 반항하는 죄악인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생명의 가치를 평가하셨다. 사실 천하를 다 준다 해도 자기 생명과 바꿀 사람은 허무주의자 아니고는 아무도 없다.

과연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에 불과한 것일까? 인생의 가치가 그 정도의 수준일까? 땅에 굴러다니는 한 조각의 나무토막만도 못한 것일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내 스스로가 저주하고 끊어버리고 마는 생명 경시 풍조, 이런 저주와 죽음의 행렬을 멈추어야 한다.

나는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여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목사님은 전도하기 위해 한 아파트를 방문했다. 습관대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벨을 눌렀다. 여러 번 눌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냥 돌아서려는데 마음속에 강한 음성이 들렸다. “절대로 포기하기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 계속 문을 두드렸다. 한참만에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문을 열면서 “도대체 웬 사람이길래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목사님은 전도지 한 장을 건네주며 “예수 믿고 삽시다” 간신히 한마디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늦게 전화가 왔다. 낮에 전도지 받은 사람이라며, 사연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막 자살을 하려고 빨랫줄을 목에 걸고 의자에 올라서서 의자를 발로 차버리려는 순간, 누군가 계속 문을 두들기기에 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계속하기에 죽더라도 누군가 한번 보고 죽자는 생각이 들어서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받은 전도지를 보는 순간,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자살을 멈추고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전화로 죽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면 당신은 존귀한 생명을 다시 찾게 될 것이고, 값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일찍이 알란 워커 목사는 이 엄청난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있었기에 ‘생명의 전화(life line)’을 설립하여,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자살 직전의 사람들을 상담을 통하여 구출해내고 있다. 우리 호주에도 ‘생명의 전화’를 시설하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절망적인 사람들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전화 한 통이 생명을 살리는 찬스가 될 것이다. 상담전화: 9858 5900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방과 자유  (0) 2009/08/17
북한 선교에 대한 소고(小考)  (0) 2009/08/05
천하보다 귀한 생명  (0) 2009/07/22
6.25와 공산주의  (0) 2009/07/08
돈의 철학  (0) 2009/06/24
돈의 윤리  (0) 2009/06/10

필자는 며칠 전 6.25 사변 59주년을 맞아 시드니 응답 기도원에서 동료 목사님들과 함께 나라 위해 기도회를 가지는 중에 북한의 공산주의와 현 조국의 실정을 말씀드린 바가 있다. 그것은 제가 북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2년 동안 살면서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몸소 체득하며 살다가 38선(死線)을 월남하여, 또다시 6.25동란을 직접 겪으면서 몇 차례의 죽음의 사선을 넘기며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기에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전할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6.25 사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동족간에 있어서는 안될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공산당에 의해 파괴된 교회당이 2천122개나 되고, 학살당한 목사가 5백35명이라는 통계가 나와있다. 그 외에 수를 셀 수 없는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 국군과 16개국에서 파병된 UN군, 그리고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을 포함해서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생긴 전사자가 무려 71만 명에 달하며, 민간인 345만 명이 죽고, 전쟁과부가 30만 명, 고아가 20만 명, 이것이 근대 세계전쟁 역사 가운데 최악의 사상자를 낸 참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42대의 소련제 탱크를 몰고, 장갑차가 52대, 210대의 전투기를 앞세우고 30정의 해군함정을 띄운 채 육해공군이 주일 새벽 고요한 남한땅에 대륙으로, 해상으로, 공중으로 총격을 개시하여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후인 8월 5일에 대구를 점령, 이제 부산만 함락시키면 대한민국의 존재는 없어지고 전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과 우방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의 존재는 없었을 뻔 했다. 세계 우방을 통해 우리 대한민국을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화도 좋고 민주화도 좋지만 지나간 역사까지도 부정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고 하듯이 6.25라는 북한과 소련이 공모하여 남침한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지금 세월이 많이 흘러가서 이 사실이 잊혀지고 많이 왜곡이 되어 빛바랜 앨범 속에 사진처럼 되어지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통탄스러운 것은 6.25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이 6.25 전쟁은 남한과 미국이 합작하여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젊은이들의 정서로 형성된 시국에서 6.25 전쟁은 남침이란 말이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현실이다. 그래서 한때는 침략군을 물리치고 남한을 구출해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소동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정도로 그동안 젊은 세대들이 세뇌되었다.

지금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에 이르는 인터넷과 모바일폰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대가 사이버 여론 조성에 신속하고 막강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 당국의 책임이며, 기성세대인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아직도 적화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고 온갖 음모를 꾸미고 남한까지 공산화시키기 위하여 교란작전을 펴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는 종교 말살정책을 쓰는 무신론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산주의는 가장 잔인한 살인집단이다. 성경에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도적질 하는자”(요 8:44)라고 했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사탄의 영이 지배하는 정권이므로 기독교를 적대시한다.

북한에 공산당이 점령하기 전에는 남한보다 교회가 더 많았고 크리스천도 더 많았다. 평북 선천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했고,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그 많던 크리스천들이 공산당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되고, 교회당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요즘 안티 기독교 단체들과 일부 언론 매체를 통하여, 기독교를 폄훼하고 극단적인 욕설을 서슴지 않고 있고, 근간에는 소위 목사의 타이틀을 가진 자가 자살까지 하면서,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대통령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어법으로 모독하는 유서를 남기며 체제전복을 주문하는 글을 남기는 등 심상치 않은 일들이 남한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 한국에는 악한 분렬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 이 분렬의 영과 싸워 이기기 위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조국을 위하여, 위정자들을 위하여, 대통령을 위하여, 세계 평화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 할 때이다.(딤전 2:1-2)

이 글은 지난 6.25 기념 기도회에서 전한 말씀 중의 한 부분이다.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 선교에 대한 소고(小考)  (0) 2009/08/05
천하보다 귀한 생명  (0) 2009/07/22
6.25와 공산주의  (0) 2009/07/08
돈의 철학  (0) 2009/06/24
돈의 윤리  (0) 2009/06/10
남편을 세웁시다.  (0) 2009/05/26

돈의 철학

칼럼/목회칼럼 | 2009/06/24 13:19 |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웨슬리 목사님이 돈에 대해 설교를 하겠다고 하자 그날따라 굉장히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관심을 가지고 모인 것이다. 웨슬리 목사님의 돈에 대한 첫 번째 설교 대지는 “할 수 있는 한 돈을 많이 버십시오”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목사님이 밤낮 하늘나라 복음만 전하는 줄 알았는데 현실 감각도 있고 센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설교 대지는 “할 수 있는 한 돈을 많이 저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경제 전문가도 아닌 목사님이 저축까지도 이해하시는구나. 역시 목사님은 센스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저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신다”하고 모두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세 번째 대지에서 “여러분이 돈이 귀하고 돈을 많이 모아야 하는데 그 모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그것을 선한 사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십시오” 하니까, 어느 분이 혀를 차면서 “저 목사님의 멋진 설교를 막판에 망쳤다” 하더란다.

사람은 물질에 약하다. 돈과 사람의 관계를 분석해 보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돈을 번다.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열심히 일해서 정정당당하게 돈을 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성경은 게으른 것을 죄라고 지적한다. 사람이 일하지 아니하고 요행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죄악이다. 그다음 단계는 돈이 돈을 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그다음 단계이다. 그것은 돈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래서 돈 때문에 사람이 못쓰게 되고, 존이 사람을 돌게 만들고 망하게 한다. 사람이 돈의 지배를 받으면 눈이 어두워져서 형제도 스승도 이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성경에 나오는 가룟유다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그는 돈 때문에 돌아버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끝냈다. 오늘 이 가룟유다 형의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웨슬리 목사님은 돈에 대한 교훈을 줄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그런 생활철학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아주 힘든 삶을 살았던 웨슬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목회자가 되게 하지 않고, 옥스포드 대학의 교편을 잡고 가르치도록 하셨다. 그런 덕분에 그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살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를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못되었구나” 자기의 삶을 정리해 보았다. 그때에 웨슬리가 받는 봉급이 1년에 30파운드였다. 그 가운데 28파운드는 전부 자기 자신을 위해 쓰고, 기껏해야 2파운드만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나누어 주는 일에 힘써야겠다”

그때부터 그는 열심히 일했다. 부지런히 벌어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강의하고 좋은 책을 많이 썼다. 그래서 60파운드의 소득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생활비는 28파운드로 고정시켰다. 나머지 32파운드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했다. 그다음 더 열심히 벌어서 90파운드의 소득이 생겼다. 그러나 생활수준은 그대로 28파운드로 억제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다음 하나님 앞에 설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책들 외에 다른 것을 남긴 것이 있다면 나의 두 손이 나를 고발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생동안 생활비 30파운드 이내로 고정시켜 놓고 그 나머지는 전부 다른 사람을 위해 썼다.

1791년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그가 수중에 남긴 돈이라고는 고작 그의 주머니와 서랍 속에 동전 몇 푼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가 세워놓은 원칙대로 아름답게 살다 갔다. 웨슬리가 우리에게 돈에 대해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그의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기를 원한다.

1. “Give all you can” 최대한으로 많이 벌라는 것이다.
2. “Save all you can” 최대한으로 돈을 아껴 쓰라는 것이다.
3. “Give all you can” 최대한으로 남에게 주면서 살라는 것이다.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하보다 귀한 생명  (0) 2009/07/22
6.25와 공산주의  (0) 2009/07/08
돈의 철학  (0) 2009/06/24
돈의 윤리  (0) 2009/06/10
남편을 세웁시다.  (0) 2009/05/26
행복하게 살려면 부모님께 효도를!  (0) 2009/05/13

돈의 윤리

칼럼/목회칼럼 | 2009/06/10 17:02 |

이 글의 제목을 “돈의 윤리”라고 했지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돈에 대한 윤리란 말이 타당할까? 돈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돈 때문에 부정을 행하다가 법에 걸려서 원치 않는 곳에 들어가 살아야 하고, 그렇게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돈으로 말미암아 실망을 주고, 하루아침에 그 인격이 무너지는 일들이 우리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솔직히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좋아한다. 그래서 “뭐니 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죠지 버나드 쇼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돈, 세상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는 “돈”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이야기도 역시 “돈”일 것이다. 성경은 돈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돈은 물질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물질을 만드신 분이 누구인가? 물질을 만드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보셨다. 이것은 창조의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창조의 단계가 진행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감탄하셨다. 물질을 대표하는 돈을 본래 선한 것이다. 그래서 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성경은 말했다.(전 5:19)

그러므로 돈을 좋아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성경은 돈이 악하다고 하지 않는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딤전 6:10)

돈을 좋아함이 사랑으로 바뀔 때 그 돈은 맘모니즘(mammonism)이 된다. 맘모니즘은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맘몬(mammon)이란 말은 “나는 믿는다”(I believe)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돈을 자꾸 소유하는 일에 혈안이 되고, 돈이 나를 소유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돈을 믿는다. 돈을 하나님으로 믿게 된다. 돈이 나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말씀한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말씀한다. 누구도 죽을 때 돈을 가져가지 못한다. 돈은 우리가 육신을 갖고 사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결국, 떠나야 할 한시적인 삶을 살면서 돈에 매여 살다가 세상을 마치는 것 이상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도 현대인은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돈 때문에 순결을 잃고, 권력 유지 때문에 불의한 방법으로 자금을 모으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성경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께 시험을 걸어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이것은 모든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유혹이다. 오늘 이 사탄의 시험에 걸려서 패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돌로 떡 덩이를 만들어 먹으려다가 목에 걸려서 낭패를 보는 사람을 많이 본다.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잘 분간해야 하는 것이 지혜이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욕심이 땅덩어리보다 더 두텁다”는 말이 있다. 한평생이 아니라 두 평생을 살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왜 더 많은 돈을 욕심내고 부정을 행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맘몬신은 세상을 고향이라고 가르친다. 맘몬신은 내가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움직여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세상이 전부이므로 여유가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최고와 최상으로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오랫동안 마음껏 누리기 위함이다. 은퇴 후까지 편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함으로 밤낮없이 땀을 흘린다. 자기만족을 위해 24/7 전력 질주한다.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여 돈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의 고향이 이 땅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물질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인생은 물질을 바르게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돈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어떤 분이 말한 바가 있다. 돈을 선한 일에 사용하면 돈은 선한 것이고, 악을 행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아픔을 준다면, 돈은 악한 것이 되고 탐욕의 우상이 된다.

한평생 우리에게 주어진 돈을 선한 목적을 위해 선한 수단으로 선용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와 공산주의  (0) 2009/07/08
돈의 철학  (0) 2009/06/24
돈의 윤리  (0) 2009/06/10
남편을 세웁시다.  (0) 2009/05/26
행복하게 살려면 부모님께 효도를!  (0) 2009/05/13
행복한 자녀로 키웁시다.  (0) 2009/05/01

가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가정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사람의 사람됨이 가정에서 만들어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능력이 가정에서 다듬어진다.

세상을 읽고 바라보는 눈이 열리고,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사고가 생성된다. 가정은 인격의 훈련소이며 행복의 발전소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람을 만들고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오늘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은 병든 가정에서부터 발생한다. 극단적인 일이지만, 왜 상식으로도 이해가 안 되고, 말도 안 되는 동성애 문제가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생겨날까?

실례를 들어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아들이 며느리라고 데리고 왔는데 남자이다. 딸이 사위라고 데리고 왔는데 여자이다. 이런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 팽창해 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 사회의 동성애 문제의 등장은 높아진 이혼율과 무관하지 않다. 건강한 가정을 갖고 있는 사회는 동성애 문제 따위가 이슈가 되지 못한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가정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높은 이혼율은 앞으로 많은 동성애자들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한번 동성애자가 되고 나면 이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은 것의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성애자를 막는 방법은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족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가족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활짝 열어 행복을 나누는 가정, 가족관계 속에서 아버지에게서 남성(男性)다움을, 어머니에게서 여성(女性)다움을 경험하며, 자녀들이 부모를 신뢰하며 존경하고, 부부가 애정과 존경으로 세워지는 가정에서 동성애자들이 나오지 않는다.

현대사회나 가정에서는 남녀차별을 없애는 양성평등을 지향한다. 남녀 간의 차별은 없어져야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역할까지 혼돈이 와서는 안 된다. 아버지가 존경받고 권위와 질서가 세워진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는 원만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미국 시카고에 청소년 문제 담당자가 청소년 범죄자들의 가정환경을 조사한 결과, 많은 수가 내(內)주장, 안사람들이 주장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어머니가 머리의 위치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모두 청소년 범죄자들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머리에 위치한 가정은 자녀들 마음속에 무서운 반항심이 싹튼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가정은 아이들도 존경심과 순종의식이 길러지는데, 어머니가 위에서 힘을 과시하니까 아이들 마음속에 반항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요즘 여성 상위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서인지,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더불어 가정에서도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것 같고, 상대적으로 언제부터인지 소리없이 작아지는 남편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다. 그동안 익숙했던 남성 상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면서, 여전히 가정의 책임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남성들인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이 잘 되려면 남자들의 기(氣)가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사기(士氣)로 산다”는 말이 있다. 아내가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잔소리를 다해도 남편의 기를 꺾는 말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고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을 세워주는 아내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의 허물을 들추어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자기 남편을 자신의 주인으로 존경하고 세워주어서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했다. 아브라함의 생을 보면 허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혼의 대상이다. 그런 허물을 끝까지 인내하며 남편을 세워준 아내의 내조의 힘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여인의 모습이 우리 가정 안에 살아 있으면 좋겠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가정에서 왕으로 모시라! 남편을 왕으로 세워주면 자신은 왕비가 되고, 아들은 왕자, 딸은 공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대비마마가 되고, 사는 집은 왕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남편을 종처럼 생각하면, 자신은 하녀가 될 것이다. 이 엄청난 축복을 헤아리고 사는 지혜로운 아내가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끝으로 양은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이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에 오는 행복의 세 가지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면 아내 자신이 행복해진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면 남편이 행복해진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가정이라야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난다.

'칼럼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의 철학  (0) 2009/06/24
돈의 윤리  (0) 2009/06/10
남편을 세웁시다.  (0) 2009/05/26
행복하게 살려면 부모님께 효도를!  (0) 2009/05/13
행복한 자녀로 키웁시다.  (0) 2009/05/01
죽음과 삶  (0) 200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