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은 예수께서 오신 날을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날이라 해서 사람들이 태어난 날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 역사 세계에 오신 날이기 때문이다. 만물을 만드신 분이 자기가 지은 피조물 세계에 오신 것이다.
이 기묘하고 전무후무한 사건을 인간의 이성적인 말로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여기에 예수께서 탄생하셨던 그 당시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덴마크의 신학자 킬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모하고 그리워했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을 진실하게 믿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첫째 고민이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로 만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납득시킬 수 있을까. 배우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가 안된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할까. 이것이 고민이었다.
그리고 셋째로 잘 되고 못 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넷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이 고민이었다. 물론 연구도 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다. 많은 고민 끝에 결론을 얻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 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갔다. 거기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된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익히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다. 마침내 그는 그 여인과 만나게 된다. 이윽고 그는 고백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 왔노라”고 사랑을 고백했다.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그대로 믿고 받아드려 왕궁으로 들어가 훗날 왕후가 된다.
아주 로맨틱한 이야기이다. 우리 한국의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로맨스로 받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사랑은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 비로소 사랑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지불한 사실을 확증해 준 표적이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만물을 지으셨던 그분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을 ‘인카네이션’-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의 극치이다. 이날을 일반 사람들이 태어난 생일날처럼 가볍게 알고,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고 카드주고 파티하며 즐기는데 그치는 것은 성탄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성탄절은 언제부터인가 백화점이 먼저 알려주는 성탄절로 바뀌었다. 12월만 되면 거리는 즐거워진다. 흥겨운 리듬의 캐럴과 화려한 전구들,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 할아버지가 하얀 수염에 붉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마케팅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빨간 색감의 물결과 따뜻함을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한껏 취해 버린다.
크리스찬인 우리가 먼저 성탄절의 의미를 알리고 즐거워하기도 전에 길거리와 상점들이 먼저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이제 성탄절은 모든 사람들이 한 해를 정리하며 기다리는 일반 명절이 되었다. 성탄절의 본질은 사라지고 상혼으로 점령당한 거대한 시장으로 변했다.
더욱이 크리스마스를 홀리데이로 바꾸어야 할 정도로 갈수록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기독교 문화의 현실을 보면서,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적잖이 우려가 된다.
이 기간은 아이들이 방학을 하고, 직장의 문을 닫고 모두 쉬는 사회시스템에 맞추어야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하나의 휴일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2000년 전 주님이 이 땅에 찾아오실 때 육의 향락에 도취되어 배척한 유대인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이 성탄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어지기를 기도드린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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