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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칼럼으로 13주에 걸친 ‘18세기 고전시대의 음악후원 (모짜르트 편)’ 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모짜르트의 이태리 오페라는 Da Ponte 라는 그 시대 시인의 글을 소재로 썼고 오페라 극중 인물은 수세대에 걸쳐 이야기로 전해온 희극적인 인물에 근거함으로써 관중들에게 친밀감과 익숙함을 제공했다. 또한 모짜르트의 희극 오페라 (opera buffas) 는 실질적인 인물의 소재와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극본으로 관중을 만남으로써 시대의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동시에 ‘전 세계적’ (universal)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classic’ (고전) 의 정의 (definition)를 달성시켰다.

모짜르트의 희극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The Marriage of Figaro) 은 처음 공연 직후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엔나 관중들은 곧 관심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가로의 결혼’의 명성으로 모짜르트는 Prague 에서의 그의 또 다른 오페라 ‘Don Giovanni’ 의 공연을 요청받기도 했다. 희극인 코믹 오페라와 무겁고 심각한 내용의 opera seria의 중간 형태인 ‘Don Giovanni’는 다소 생소하고도 또한 논쟁의 여지를 일으키는 내용으로 인해 비엔나 관중들은 ‘피가로의 결혼’ 으로 다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으로 한 시대의 음악 작곡과 흐름, 발전, 그리고 연주, 공연들에 미치는 관중들의 영향력을 엿볼수 있다.

모짜르트의 음악은 그의 인생 전반을 거쳐 다양한 음악후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음악활동 초기에는 가장 전통적인 귀족중심의 후원이 그의 음악적 성공에 큰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1781년 비엔나에 정착할 무렵, 전 유럽에 걸친 큰 사회적 변화로 인해 그는 더 이상 귀족중심이 아닌 콘서트와 개인레슨, 그리고 음악출판을 통한 평 시민 중심의 음악후원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따라서 모짜르트에게 음악인으로서의 작곡과 활동에 큰 자유를 제공했다. 또한 그의 음악적 창작활동은 어쩌면 시대의 요구와 광범위하고 다양한 관중에 의해 달성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음악칼럼을 애독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쁜 학업과 준비중인 논문관계로 한동안 음악칼럼을 쉬게 되었읍니다.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음악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읍니다.

Musical Patronage in the Classical Era

피아노 협주곡들을 작곡함으로써 당시 그의 주요한 두 그룹의 후원자였던 음악 전문인들과 아마츄어 모두를 만족시킬수 있게된 모짜르트는 자신의 연주 콘서트를 위한 작곡은 피아노 협주곡으로 택함으로써 협주곡에 highlight 라 할수 있는 솔로 부분 cadenza 를 통해 자신의 능숙한 연주 테크닉과 뛰어난 창작력을 과시했다.

모짜르트는 가볍고 경쾌하며 노래 (lyrical)와 같은 이태리음악 스타일을 선호했고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당시 비엔나 고전 피아노 음악은 모짜르트가 선호하던 이태리 오페라의 성악곡과 같이 멜로디의 악절 구분이 뚜렷하고 빠르게 오르내리는 음계 (fast passage-work of running scale)와 전형적인 반주 스타일의 특징을 보이게 되었다.

Pauly 라는 음악인은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듣는이로 하여금 그 곡에서 다루는 모든 의미를 경험하게 하고 또한 그 음악안에서 작곡가를 만나며 고전시대 음악의 참 느낌을 맛볼수 있게 한다” 라고.

이태리는 고전시대 당시 여전히 오페라의 가장 대표적인 중심지였으나 모짜르트가 세상을 뜰 무렵부터 독일어가 사용되던 지역에서는 독일오페라가 더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오페라는 모짜르트 평생의 열정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태리 오페라의 스타일을 자신의 작곡에 사용하고 그 형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매우 뛰어나고 능숙했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당시 왕궁중심의 주제로 이루어졌던 심각하고 무거운 스타일의 오페라 (opera seria) 는 점점 그 인기를 잃게 되었다. 평민들의 일상생활이나 진실된 감정, 그리고 환상이 아닌 좀 더 실질적인 인물을 다룬 코믹 오페라 (opera buffa) 가 훨씬 관중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왕 Joseph 2세 역시 이러한 코믹 오페라를 더 선호함으로써 비엔나에 있는 모든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는 주로 코믹오페라가 되겠금 지시되었다.

모짜르트가 작곡한 opera seria 중엔 1781년에 작곡된 Idomeneo 와 1791년에 작곡된 La Clemenza di Tito 가 있다. 그가 1786년에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과 ‘Cosi fan tutte’ (1790) 는 역사적으로 명성이 높은 코믹오페라의 대표적인 성공작들이라 할수 있다. 또한 1787년에 작곡된 ‘Don Giovanni’ 는 코믹과 무거운 스타일의 중간 형태를 갖춘 최초의 혼합 스타일의 오페라로서 고전 시대의 또 다른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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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이후 피아노는 음악인들의 요구와 기호에 맞는 기능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더욱 더 풍성하고 부드러운 소리는 물론 더 다양하고 수준있는 연주스타일을 가능케 하였다. 당시 Pianoforte 라고 불리던 그랜드 피아노는 콘서트를 위한 최초의 독주 (solo) 용 건반악기 였다.

이러한 피아노의 발전에 매우 열정적이었던 모짜르트는 그의 평생을 통해 수많은 피아노 곡들을 작곡하게 되었다. 모짜르트가 비엔나에 살기위해 도착했을때 그는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의 솔로가 주를 이루는 관현악곡) 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는 최고의 길이라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사랑받아왔던 그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들, 특히 그가 비엔나에서 작곡한 곡들이 바로 그 예다.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당시 오페라에 대한 그의 애정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K466 은 그 느낌이 그의 오페라 ‘Don Giovanni’, 그리고 ‘Idomeneo’ 와 비슷하며 그의 또 다른 피아노 협주곡 K467 은 그의 오페라 ‘The Magic Flute’ 을 요약해 놓은듯한 느낌이다.

모짜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그 섬세함과 능숙함으로 많은 감탄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타고난 그 시대 최고의 연주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이러한 모짜르트의 연주 능력을 마음껏 과시할수 있는 폭을 제공했다. 당시 부유한 시민들의 음악적 후원이 절실했던 그는 점차 청중들이 이해할수 없는 음악, 그리고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음악의 작곡을 피하기 시작했다.

모짜르트는 그가 비엔나에서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을 그의 아버지 Leopold 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 피아노 협주곡들은 아주 어렵거나 너무 쉬운 곡들의 중간자리를 채울수 있는 아주 유용한 균형물이다.” 라고. 이러한 피아노 협주곡들을 작곡함으로써 그는 당시 그의 주요한 두 그룹의 후원자였던 음악 전문인들과 아마츄어 모두를 만족시킬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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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렌스 (freelance) 음악인들이 증가하던 18세기 그 무렵,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의 모짜르트 개인 콘서트는 음악적으로나 수입 면에서 모두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모짜르트는 궁중 실내음악 연주자의 자격으로 궁중 salary (월급)를 받고 있었지만 당시 평균적인 수입에 불가했을 뿐 충분한 수입이 되지 못했고 5년간 지속되던 그의 콘서트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연주횟수가 점차 줄기 시작했다.

이 무렵 모짜르트는 영국 런던과 Perussia 에서 상당히 높은 수입을 제안하며 일해 줄것을 제의 받았으나 비엔나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는 역사적으로도 그 이유가 분명치 않다. 또한 그의 유명한 오페라 곡들 중 “The Magic Flute” (마술 플룻) 을 바로 이 무렵 작곡 제의를 받았을 걸로 추측되고 있다.

1790년, 비엔나의 새로운 왕 (Leopold II)이 등장하면서 모짜르트는 그의 관심과 주목을 받기 원했다. 더구나 이 무렵 모짜르트는 당시 St Stephen 성당의 예배음악 인도자 (지금의 교회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지휘자) 가 사망하거나 사임할 경우 그 자리를 약속 받은 상황이었고 그 자리는 당시 모짜르트가 일하던 곳보다 훨씬 많은 월급이 보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모든 기대와 소망은 불행하게도 그가 1791년 겨우 35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평소에 다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그는 결국 많은 빚을 남겼다.

한편 모짜르트가 비엔나에 계속 머무른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음악에 열정적이었던 그에게 비엔나라는 도시는 비록 그에게 흡족할 만한 수입은 제공하지 못했지만 다른 어느 곳보다 음악적인 도시로서 왕에서부터 가사도우미까지, 사회적인 위치나 빈부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모두가 음악 연주회에 관심 갖고 참여하는, 그리고 당시 런던이나 베를린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는 최고의 도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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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al Patronage in the Classical Era

18세기 고전음악의 혼합 스타일은 당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음악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수있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 제국은 당시 독일, 북부 이태리, 그리고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골고루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각 나라의 귀족들은 매년 한 시기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머물며 각각 다른 문화를 서로 나누곤 했다.

모짜르트는 1781년 4월 이후로 비엔나에서 작곡을 시작했다. 모짜르트는 비엔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곳은 내가 작곡을 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곳이다.” 라고. 그의 작곡과 음악적 활동 성과는 비엔나에서 그 최고점에 이르렀고, 특히 1786년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 ‘The Marriage of Figaro’ (피가로와의 결혼) 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고향인 살즈버그와 대주교를 위한 고용직을 벗어나 중심도시로 이주, 그 이유로 인해 상당히 압박 받았던 그의 삶과 일, 하지만 모짜르트는 비엔나에서 고용직이 아닌 프리렌서(freelance musician)로서 개인 레슨과 연주, 그리고 작곡으로 성공적인 활동과 만족스러운 수입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음악인들이 독립적으로 일하지 못했던 전과 달리 음악후원은 모짜르트와 같이 프리렌스 음악인들이 증가하던 이무렵부터 가장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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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황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민 증가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1778년에는 독일 오페라를 위한 공연단을 체계화 시켰다. 독일 오페라는 당시 이태리 오페라보다 테크닉적으로 더 간단하고 독일인 성악가와 연기자또한 저 예산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독일 오페라는 당시 극장 공연 문화의 전통을 지킨 동시에 프랑스 opera comique (희극 오페라) 의 영향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이태리 오페라 외에 이러한 새로운 오페라의 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태리 오페라를 선호했고, 따라서 독일인 공연단을 위한 후원은 아직 많이 부족했다.

비엔나 황실은 또한 opera buffa (희극 오페라의 또 다른 이름) 단을 1783년에 설립하였고 이 오페라단은 결국 유럽에서 최고 명성의 오페라단이 되었다. 비엔나 황실은 당시 평범하고 보통 일상 생활의 내용과 실질적이고도 진실된 감정을 다룸으로써 많은 인기를 누리던 희극 오페라를 선호했다.

하지만 오페라 극본 작가들 (librettists)과 작곡가들은 희극 오페라안에 opera seria 라는 심각하고 엄숙한 내용의 오페라 스타일을 조금씩 삽입 시키기 시작했고 이러한 두 스타일의 혼합은 당시 비엔나 오페라의 두드러진 개성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모짜르트의 Don Giovanni 라는 오페라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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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비엔나가 고전시대의 음악 최중심 도시였던 18세기 후반은 오스트리아가 개혁을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왕국정치가 정부체제의 정치로 변환되기 추구되던 시기, 1776년에 theatre (극장, 공연장)들이 개조되고 재편성 되며 전국 공연장의 경영이 왕궁의 직접적인 지배와 감독, 관리를 받게 되었다.

또한 예술공연 관련 문제에 있어 종교적인 (당시 Catholic Church) 권력이나 영향이 억제되기 시작한 동시에 작곡가와 음악인들에게 종교음악 보다는 세상음악의 작곡과 공연이 더 권장되기 시작했다.

당시 고전시대 대부분의 훌륭한 곡들이 비엔나에서 작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문화는 그무렵 런던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뛰어난 실력자 외에는 큰 규모의 공연이 허용되지 않던 비엔나의 당시 상황은 그무렵 비엔나에 도착한 모짜르트에게 큰 흥분과 자극, 도전을 느끼게 했다.

비엔나의 Burgtheater (Berg 공연장) 는 1350석으로 이루어진 큰 규모의 공연장으로써 각 관람석이 사회적 신분에 따라 분리되고 편석되어 있었다. 그곳 공연티켓의 가격은 상당히 비쌌고 관람객의 대부분은 음악적으로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을뿐 아니라 오랜기간동안 그 공연장을 후원해오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 비엔나 음악의 악보 출판은 1780년부터 시작되고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당시 비엔나의 비전문 음악인들의 증가로 인해 출판업계 사람들은 출판사업의 가능성을 감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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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확실하고 안정된 자리에 대한 시급함을 느끼기 시작하던 모짜르트는 1775년 비엔나 대주교에게 또 한번의 비엔나 방문을 허락받았다. 이 비엔나 방문에서 모짜르트는 처음으로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의 음악을 듣게된다. 그후 그는 Augsburg와 Mannheim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지역 특유의 큰 범위의 오케스트라와 정기적인 클라리넷 출연을 포함한 완벽한 목관악기 형성의 오케스트라에 감탄했다. 또한 그는 Mannheim지역의 독일 오페라 성행에도 주목했다.

모짜르트는 그후 프랑스 파리를 거쳐 다시 고향 살즈버그로 돌아왔다. 그는 밀린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대주교의 고용 음악인으로 일을 지속해야 했으나 결국 그는 대주교와의 좋지않은 관계로 그 일을 접게되었다.

마침내 모짜르트는 1781년 그의 부인과 함께 비엔나로 영구적인 이주를 하게되고 누구에게 고용되지도 간섭받지도 않는 독립적인 프리렌서 음악인으로 일하게 된다. 그 무렵 그는 비엔나에서 꽤 알려져 있었으며 왕의 궁중 음악인으로 고용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784년 이후 비엔나에서의 프리렌서 음악인으로 성공하게 되었고 또한 그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비엔나는 당시 고전시대의 음악 최중심 도시였을 뿐만아니라 모짜르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von Gluck), 베토벤 등 젊고 유망한 음악인들의 마음을 유인하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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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살즈버그(Salzberg) 귀족들의 외면을 뒤로하고, 모짜르트는 12살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가 비엔나로 돌아온 이유는 그곳에서 모짜르트 작곡의 오페라에 대한 주문과 연주가 가장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Joseph 왕 2세에게 오페라작곡을 주문 받은 모짜르트는 그에이어 이때에 오페라 La Finta Semplice를 작곡했다.

이후 모짜르트 가족은 1769년 살즈버그에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모짜르트는 1770년 베로나(Verona)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인을 위한 공식적인 콘서트를 가졌고 대단한 극찬을 받게되었다. 그들은 그후 무려 15개월동안 이탈리아의 Milan, Bologna, Florence, Rome, Naples을 두루 여행하며 모짜르트의 오페라작곡에 대한 재능과 실력을 한층 더 키웠다.

한편 당시 로마교황 Clement는 모짜르트에게 이탈리아의 귀족과 같은 신분을 수여함으로 그에대한 존경과 감탄을 표현했다. 모짜르트 가족은 이와같이 영광스런 예우를 받고 오페라작곡에 대한 많은 성과를 안겨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침내 15개월만에 접고 고향인 살즈버그로 다시 돌아왔다.

1772년 살즈버그 대주교가 사망하고 그 자리가Count von Colloredo로 대치되면서 그와 별로 좋지않은 관계에 있던 모짜르트 가족은 모짜르트의 음악적 미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다른 영구적인 자리를 찾지못했을 뿐만아니라 더이상 대주교를 위한 일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모짜르트는 좀더 확실하고 안정된 자리에 대한 시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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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 오늘부터 한동안은 모짜르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월프강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1762년 그의 아들 딸 (모짜르트와 그의 누나)을 데리고 Munich와 Vienna로 여행을 떠났다. 그의 아이들의 음악인으로서의 미래에 밑바탕이 되는 아주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그들은 그후 1763년에 독일과 네델란드, 그리고 프랑스 파리와 Versailles 로 향했다.

Vienna와 Versailles 에서 그들은 오스트리아인들과 프랑스 왕궁의 특별한 관심과 주목을 받았을뿐 아니라 그나라 귀족들에게 음악적인 후원을 받게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모짜르트가 7살이 되었을때는 모짜르트의 작곡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출판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모짜르트 가족은 1764년, 프랑스 파리보다 당시 훨씬 음악 중심도시였던 영국의 런던으로 향했다. 그들은 도착후 며칠후 런던 궁중에서 매우 성대하고 성공적인 콘서트를 가졌다. 모짜르트 가족은 그 후 런던에서 연주되는 여러번의 이탈리아 오페라 콘서트에 참석하여 관람했는데, 평소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많던 모짜르트에게 런던에서의 이 관람은 훗날 그의 작곡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준 음악적 경험이 되었다.

마침내 그의 가족은 고향인 Salzberg로 돌아오게 되었다.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이무렵 궁중 음악인으로써 살즈버그의 대주교(Archbishop) 에게 월급을 받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도시 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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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간의 칼럼에서 살펴보았듯이 음악후원 출처(origin)의 변화와 그로 인한 음악사회에 끼친 다양한 영향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18세기는 음악적으로 여러나라의 특성이 엇갈린 혼합 스타일(mixed style)이 발생하던 시기이다.

이 시대의 음악은 멜로디, 화성, 형식, 질감, 그리고 테크닉까지 모든 음악요소면에서 이탈리아의 성악곡, 프랑스의 춤곡, 그리고 독일의 기악곡의 영향이 골고루 섞여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는 유럽의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이탈리아, 프랑스의 음악과 음악인들을 선호하고 대우했던 시대이다. 하물며 부유한 독일인들도 자국인 독일음악보다 이탈리아 음악에 돈을 투자하곤 했다. 18세기 고전시대는 또한 종교음악이 점점 쇠퇴(decline)하고 secular music (세상 음악 – 즉 신이 아닌 사람을 위한 음악)이 발달한 시기였기도 하다.

다음주 부터 이 시대(18세기) 음악사회의 흐름이 모짜르트 음악에 끼친 영향을 자세히 살펴보기 이전에 오늘은 모짜르트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월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1756년 1월 27일 그 시대 궁중 음악인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겸 작곡가 레오폴드 모짜르트(Leopold Mozart)의 아들로 오스트리아 살즈버그(Salzburg) 에서 태어났다.

그는 4살부터 다양한 건반악기를 접하게 되었고 절대음감(absolute pitch)과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한동안의 칼럼은 18세기 고전시대 유럽사회에서 음악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18세기의 대표적인 천재 작곡가 모짜르트가 1781년부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살면서 썼던 작품들 (예를들어 그의 피아노 협주곡들과 오페라 ) 시대 사회적, 그리고 상업적인 요소로 인한 음악후원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집중 할것이다.


시대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전반적인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그로인한 음악후원이 음악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반드시 공부해야만 한다.

음악의
고전시대는 아래와 같이 이해될수 있다. 왕이나 귀족만을 위한 콘서트 대신 대중을 위한 콘서트의 붐이 일기 시작하고, 종교, 교회음악의 내리막이었던 동시에 서로 다른 오페라 (opera seria opera buffa) 구분 대신 여러 스타일의 혼합, 그리고 귀족중심 음악후원이 중산층 대중 중심 음악후원으로 대체되던 시대,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은 유럽의 각각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무렵 유럽은 기근과 역병의 내리막으로 인해 인구가 늘어나고 농업의 향상으로 도시인구가 점차 늘어났으며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의 새로운 직업들이 제공되면서 중산층 사람들이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도시의 확장,  도시인구 증가, 중산층의 경제적, 그리고 여가생활의 성장이 이시대 (18세기 고전시대) 음악후원 중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전의 음악후원은 주로 귀족중심으로 형성되어 음악인들은 귀족들의 고용인으로써 안정되고 정기적인 수입을 보장받았던 동시에 거의 자유가 없었으나 18세기 사회적 변화로 인해 귀족이 아닌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민들도 음악의 스폰서나 후원인이 되면서 음악인들에게 많은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에 비해 수입이 안정적이고 정기적이진 못했으며 수입도 훨씬 낮았다.


-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 

  오늘은 지난 6주간 연재되었던 “연주의 전통”에 대한 칼럼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즉흥연주 기법(extempore embellishment)이란 연주자가 작곡가의 곡을 음악적으로 충분히 소화시켜 그 곡의 전체적인 느낌과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에 의해 주어진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꾸미고 개조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흥연주 기법의 이행에 있어 음악인들 사이의 논쟁은 서로 다르게 충돌하는 두 의견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연주자에게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 권리, 또는 특권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꼭 지켜져야 하는 제한이나 금지(restriction)에 관한것이다.
 
즉흥연주의 묘미라 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과 선택적인 요소로 인해 자칫 잘못하면 과도하고 사치스러운 꾸밈이 될 수 있는 반면 동시에 연주자에게 곡 전체의 느낌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도 안에서 멜로디의 감성과 느낌을 향상시키기 위한 무한한 탐구가 허락된다.

즉흥연주의 대표적인 예로 18세기와 19세기의 협주곡 Cadenza를 들수 있다. 19세기에 들어 연주자의 창작적인 탐구의 연주가 더욱 권장되긴 했지만 곡 전체의 스타일과 내용에 도움이 되고 협조되어야 하는 cadenza연주가 창작적이고 감각적인 연주에서 벗어나 단지 연주자의 과도한 연주기술의 진열과 전시에 치중되면서 작곡가들은 악보에 즉흥연주 부분을 완전히 다 적어넣음으로써 연주자의 자유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학생들은 창작적이고 감각적이며 지식적인 연주를 위해 끊임없이 역사적인 연주의 전통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연주의 전통에 대한 칼럼을 잠시 뒤로 하고 지지난주 토요일 7월 24일에 있었던 호주 한인 청소년 클래식 음악경연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호일 학원 원장인 본인의 제자 두 명도 역시 참가했었다. 한 학생은 초등 저학년부 피아노 부문에서 금상을, 또 다른 학생은 초등 고학년부 피아노 부문에서 동상을 받는 등 활약해 다시 한번 축하를 전한다.

이번 대회를 위해 두 학생을 준비시키는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를 오늘 칼럼의 주제로 정해보았다. 우선 이런 음악행사가 더 많이 활성화 되어서 학생들이 연주의 경험을 쌓고 다른 학생들의 연주도 들으며 선의의 경쟁을 통한 좋은 음악적 경험을 충분히 할수 있기를 바란다.

한 곡을 처음 배워서 악보를 익히고 연주와 동시에 마음속으로 멜로디를 자유롭게 노래할수 있을만큼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항상 주의를 요하는 위험한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연주를 경험해 본 사람은 다 동감 할것이다.

테크닉 적인 면에서 볼때 한 음악을 너무 잘 알아버렸을때 우리는 자연적으로 음악의 매 순간마다 필요한 집중력과 주의력을 잃게 된다. 또한 점점 빨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손가락이 우리의 생각의 통제를 벗어나 자발적으로 움직이면서 흐르거나 미끄러지는듯 정확하지도 또렷하지도 않은, 또한 연주자가 표현하고 싶은 음질 (tone quality)과는 상관없는 연주가 되버리는 것이다.

음악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 음악을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연습하다보면 그 곡에 대한 흥미를 자연적으로 잃게될수 있다. 마음속에선 이미 그 곡에 대해 흥미를 잃고도 무조건 연습만 많이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한 곡을 철저히 배우고 익히며 충분한 연습 후에는 얼마간의 기간동안 그 곡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일반적인 연습을 하다가 적당한 기간후 연주일에 맞춰 다시 새로운 곡을 연습하듯 본격적인 연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게되면 그 음악은 이미 그 기간동안 우리안에서 더 깊이있게 성숙되었을 것이고 동시에 새곡처럼 신선한 반가움으로 돌아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은 연습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좋은 연주로 연결될수 있는 연습을 최고의 집중력으로,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해야할 것이다.

멜로디의 어형 또는 굴절 (melodic inflection)은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Melodic inflection은 각 악절의 구분(phrasing), 연결과 띄어 치기의 구분(articulation), 셈여림(dynamic), 리듬(rhythm)에 관련된 관리를 통해 제 모양과 윤곽이 성취된다. 18세기 중반 이후 음악악보에 셈여림 기호나 그에 대한 지시사항이 증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인 멜로디 어형의 성취는 연주자로 하여금 숨겨진 미묘한 음악의 의미를 이해하는 동시에 멜로디의 단계적 변화(melodic gradation)에 대한 직관적인 판단과 처리를 요구한다. 또한 음악적인 설득력을 갖추기에 절대적인 이러한 능력은 음악역사에 대한 지식을 필수조건으로 꼽는다.

음악의 엑센트 또는 강조(accentuation)는 우리가 말할때의 엑센트나 발음, 억양과 유사한 역할이라 할수있다. 정확한 accentuation은 각 음의 역할에 대한 서열이나 등급, 그리고 각 악절(phrase)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부분을 인지(recognize)하는 연주자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할수있다.

악보에 적힌 리듬을 음악적으로 해석해서 최대한 목적있게, 또 적절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변경하는(rhythmic alteration) 능력 역시 얼마간의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올바르고 타당한 실현을 하기 위해선 음악을 깊이있게 분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악보상 장식음이 얼마만큼 시간적으로 촘촘하게 또는 느슨하게 적혀있는 지와는 상관없이 연주자는 각 음악의 템포, 특성, 느낌, 스타일에 근거하여 정확하고 충실한 해석을 통한 장식음 연주를 해야한다. 그 이유는 장식음 고유의 자연스러움과 멜로디에 있어서 장식음의 근본적이고 중대한 역할 때문이다. 또한 연주자는 각각 다른 장식음의 개성과 역할, 그리고 각 장식음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음악적인 문맥에 놓여져 있는지도 파악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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