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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브로니 웨어라는 간호사가 수년간 말기 환자 병동에서 일하면서 마지막 모습들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그 때 그 때 블로그에 올렸다가 최근에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가지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 책에, 남자의 경우 가장 후회하는 다섯가지는, 1 내 뜻대로 살걸, 2 일 좀 덜 할걸, 3 화 좀 더 낼걸, 4 친구들 챙길걸, 5 도전하며 살걸 등이라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임종 때 경이로울 정도로 맑은 정신을 갖게 되는데,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놀랍게도 후회하는 것은 거의 비슷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끝나갈 때쯤 돼서야  얼마나 많은 꿈을 이루지 못했던가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기로 한 자신의 ‘선택’ 때문에 꿈의 절반조차 이루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이 글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필자 자신과 대비해 보았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남성들은 대부분 자신과 대비해 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나이 60이 넘은 분들은 한번 쯤은 지난 삶들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고 한번 쯤은 언젠가 닥칠 죽음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며 한번 쯤은 자신이 죽고 난 다음 주변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니까.

내 뜻대로 살 걸에 관해서는 누가 뭐래도 결코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삶을 되돌아 보건데 하고 싶은 것은 어느 것 하나 남의 눈치 보느라 참아 본 적이 결코 없다. 고교 때 유도 선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육사를 가겠다고 했을 때, 호주에 오겠다고 했을 때, 시의원 출마한다고 했을 때 등등 그 많은 터닝 포인트마다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뜻을 굽힌 적이 없다. 자랑이 아니라 성격이 그래서 참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 좀 덜 할 걸”, 이건 좀 애매하다. 죽을 때 되 보아야 알 것 같다. 필자는 30대 후반부터 나이 50되면 은퇴한다고 공언했다. 와이프한테도 항상 그랬다. 젊어 열심히 일하고 50되면 여행이나 다니며 살자고 했다. 그런데 시의원에 도전해서 당선될 때가 50이었다. 두번째 도전이었는데 와이프가 50 은퇴설을 상기 시키며 반대했었다. 다행히 당선되자 55되면 은퇴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직선 시장에 출마를 했다가 시장은 떨어졌지만 시의원에 재선되었는데 그 때가 55였다. 그 때 또 60되면 은퇴한다고 했었다. 와이프는 웃었다. 그 때 되면 또 딴소리 할 것 뻔하니까. 60이 되었을 때 시의원은 은퇴했지만 이스트우드에 세번째 부동산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65가 되면 진짜 은퇴한다고 했었다. 이제  2년 남았는데 필자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2년 후 은퇴를 할지 또 딴소리를 할지도 모르겠고, 은퇴를 한다 해도 은퇴해서 행복할지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항상  일을 좀 줄이고 싶은데 성격상 줄이지 못하고 있는 판이니, 일을 줄이고 나서 죽을지 줄이기 전에 죽을지, 줄이고 난 다음 만족해 할지 아니면 줄이고 난 다음 후회할지 도대체가 감이 없어서 이것은 두고 보아야 겠다.

그런데 호주 사람들 일 좀 덜 할걸하고 후회한다는데, 일을 많이 해서 후회하는지 아니면 많이 하지도 않고 괜히 게으른 생각에 후회하는지 모르겠다. 38시간 근무 시간이 보장된지 오래된 나라에서, 실업자 수당으로 평생을 살다가 늙으면 노인수당이 나오는 나라에서, 일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일 좀 덜할 걸 하며 죽어간다는 말인지, .

화좀 더 낼 걸”, 이것은 확실히 화 좀 덜 낼걸후회하며 죽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화 좀 더 낼걸, 후회하는 사람들이 화를 잘 내지 않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화를 잘 내던 사람이 그래도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모를 일이지만, 필자는 화를 덜 내자고 평소에도 맨날 후회하며 살기 때문에, 갑자기 도통하지 않는 한 이것은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 같다.

친구 좀 챙길 걸은 그저 그런 얘기이니 생략하고, “도전하며 살 걸은 후회할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니 생략한다. 뭔 소리냐고? 필자의 인생은 단언하건데 도전의 연속이었고, 지금도 도전할 만한 껀수가 있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판이니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독자 여러분도 어떻게 대비해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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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랄리안 데이(이하 오지데이)에 호주 국기를 차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백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러 항목을 설문으로 조사한 결과 차에 국기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있다고 분석하는 기사가 지난 주 호주일보에 있었다. 물론  단순한 애국심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 기사를 보니 옛날 일이 생각난다. 이민와서 얼마 안돼, 어느 날 국기를 달고 다니는 차들이 보였다. “갑자기 웬 국기?” 하고 알아 보니 호주 건국 기념일에 해당하는 오지데이를 축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필자도 오지데이에 차에 국기를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건국 기념일에 국기를 다는 것은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지켜야하는 국민의 도리이며 또 애국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국기를 단 차량들 끼리는 서로 크랙션을 울리거나 손신호를 하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동류 의식이나 친밀감을 나타내는 것을 느끼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호등에 서 있는데 옆 차선에 국기를 달고 나란히 서 있던 운전자가 필자와 눈이 마주쳤다. 필자가 반갑게 손신호를 보냈는데 같이 손신호를 보내다가 멈칫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동양계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같았다.

 

동양계가 호주 국기를 달고 다니다니 의외네?” 하는 것 같았다. “동양계는 호주를 내 나라로 생각하면 안돼?” 하는 생각을 하며 다음 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들 생소해하거나 의아해 했다. 그러던 중 어느 젊은 운전자가 추월해 지나가면서 크락션을 울리더니 필자가 보자 국기를 가리키며 야유성 신호를  보냈다. “동양계가 주제넘게 국기를 달고 다니다니!” 하는 것 같았다.

 

그날 바로 국기를 뗐다. 불쾌하고 황당했다. “이민의 나라에서 이민자가 호주를 자기 나라로 생각하고 애국심을 갖겠다는데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야?”하는 반발심과 백인들만 호주를 자기 나라로 생각하는 주인 의식에 대한 불쾌감이었다. 그들은 애국심이 아니라 우월감으로 국기를 달고 다닌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같이 달고 다닌게 창피했다시의원 출마 결심을 굳힌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필자는 한민족이라는 내 민족을 사랑하는 애족심과 함께 호주라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국에 살 때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는 말 즉 애국과 애족이 동의어로 쓰일 수 있지만 이민와서 사는 우리에게는 애국과 애족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과 호주를 내 나라로 생각하자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얼마  전 아리랑이라는 12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군이 자생하며 얼키고 설킬 때, 민족주의적 독립군과 왕정복구적 독립군이 대립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도 양반을 중심으로한 왕조 복구를 위한 독립운동과, 개화된 양반과 서민을 중심으로한 민족 해방을 위한 독립 운동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왕조 즉 나라와 민족을 구별하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호주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우리는 호주 국민이지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다. 이중 국적이 허용된다면 두 나라 국민이 될 수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법 논리일 뿐이다. 세금을 내고 보호를 받으며 사는 곳이 내 나라이다.  그러나 호주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한()민족이다. 한국 민족이 아니고 한()민족이며 중국계의 한() 민족이 아니고 우리 고유의 민족인 한()민족이다.

 

김진명씨의 천년의 금서라는 최근의 소설을 지난 주에 읽었다. 우리 한() 민족은 단군조선 보다 700년 전에 이미 천체를 관측하고 조류를 분석할 정도로 과학이 발전한 국가를 세운 민족이었으며, 이는 중국의 은나라나  주나라 보다도 1000년이나 앞섰다고 한다. 단순한 소설로 볼 수 없는 자료와 근거를 제시한다.

 

이것이 민족이라는 개념이다. 나라는 사라지고 세워지며 흥망이 계속되지만 민족은 문화와 얼을 지키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어쩔 수 없이 만주나 사할린으로 끌려 가야 했던 실향민들이 귀국하고 싶어하는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인지상정이며, 또 그 나라 국민으로서 권익을 보호받지 못할 때의 얘기이다.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그 나라 국민으로 권익을 누리며 사는 우리들은 사는 곳 그 곳이 곧 우리 민족의 터전이다. 우리의 문화와 얼만 간직한다면 말이다. 인종적 우월감보다는 애국적 유대감으로 차에 국기를 달게 될 날이 언젠가 올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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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안드류 윌키 무소속 의원이 노동당 지지를 철회한다고 선언했다. 무소속 의원 하나가 집권 여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2010년 연방 정부 선거가 끝 난 직후 자유당 연립과 노동당이 73 73으로 팽팽히 맞섰을 때 무소속 3명과 그린 소속 1명이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정권의 향방이 결정나는 그 아슬아슬한 시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동안 하원 의석 수에 변화가 생겨서 윌키의원의 지지 철회에도 불구하고 74 75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현정권이 그대로 존속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윌키의원은 지지 철회를 선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왜일까? 윌키의원의 지지가 필수적일 때 쥴리아 길라드 수상이 한 약속, 즉 도박 법안을 2012 5월까지 개정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길라드 수상이 정권을 잡느냐 마느냐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이 있었다. 72 72 72 73이 되고, 73 73이 되고, 그러다 73 74가 되었다. 토니 아보트와 줄리아 길라드가 무소속 의원들과 줄다리기를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이긴 것으로 믿고 있었던  그 때는 무소속 의원이 하늘의 별을 따다 달라고 해도 그러자고 약속할 판이었다.

 

호주에서의 여당과 야당은 올 오아 낫씽이다. 한국이 더 심할 것 같지만 사실 한국은 농성도 하고 의장석 점거도 한다. 자리나 직책을 여야가 서로 나누어 먹는 이상한 국회법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원칙이 지켜지는 이 곳은 철저히 올 오아 낫씽이다. 그러한 호주에서 여당이 되느냐 야당이 되느냐 하는 치명적 순간에 길라드 수상은 윌키의원에게 서면으로 도박법 개정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지지가 없더라도 정권의 향방에 문제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급한 볼 일이 끝난 순간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그에 따른 이미지 실추나 배신이라는 비난을 받을 줄 알면서도 왜 약속을 깨야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도박업자들로 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수가 그렇게도 중요한지 아니면 도박업자들의 로비, 특히 양대 정당간의 지지율이 박빙인 지역의 로비를 무시할 수 없는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약속을 어겼느냐 아니냐도  아니고, 지지 철회가 정권의 향방을 바꾸느냐 아니냐  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인 입지가 어떻고 도박 업자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수가 얼마나 큰가 하는것도 아니다. 도박이 가져오는 폐해가 당사자 개개인에게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생산성 협회(Productivity commission)라는 기구가 있다. 경제,사회, 환경 등 새로운 정책을 개발할 때 그 타당성을 조사 연구하는 연방정부 내 독립된 연구 자문기관이다. 이 협회가 2010년 도박 문제 해결 방안을 연구한 레포트를 제출했는데 그 레포트에서 현재 크게 잇슈가 문제가 되고 있는 사전 자진 한정 제도가 도박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의 방책이라고 밝혔다.

 

즉 자신의 자금 능력이나 기타 조건을 고려하여 도박에 탕진할 한도 금액을 사전에 스스로 정해 입력하면 나중에  그 한도를 넘지 못하도록 하자는 법안이다. 이를 위해 포커머신에 소프트 웨어를 장착해야 하며 기타 비용은 들겠지만 일단 셋업이 되면 한도 금액을 초과해서는 포커머신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방안은 도박 반대자들 뿐 아니라 도박 중독자들도 환영하고 있다. 도박 중독자들도 자신들이 얼마까지 잃을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중독 여부에 상관없이 돈을 잃고 나면 자제력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제력을 잃은 자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구조적 체제를 정부가 나서서 구축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도박업자들의 로비에 흔들리며 세수나 생각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도박 반대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고통으로 (도박 관련) 기업의 부를 축척한다고 말한다. 닉 세노폰 무소속 상원의원은 포커머신 업자들의 로비를 보면, 19세기 미국의 노예 소유주들이 약간의 변화라도 있게 된다면 자신들의 삶 전체를 망친다던 말이 연상된다고 말한다. 도박 중독자들을 포커 머신(업자)라는 주인에 매인 노

예로 보는 것 같다. 길라드 수상을 포함하여 위정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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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의 대표로 한명숙 전 총리(이하 한대표)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금년에 치르게 될 고국의 총선과 대선은 역사적인 대 흥행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20년만에 총선과 대선을 같은 해에 치르는 선거전에다가, 사상 최초로 해외 동포들이 투표권을 행사하고 또 사상 최초로 여성 대표들간의 대결 구도라는 흥미 거리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이하 박대표)과 한대표, 한대표와 박대표의 대결 구도에는 콩쥐와 팥쥐, 혹은 흥부와 놀부라는 대결 구도와 보복 혹은 반전을 기대하는 원초적인 흥미거리가 내재되어 있다. 티브이 드라마의 경우 악역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악한 자와 착한 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갈등 구조가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다가 보복 혹은 반전이 되면서 드라마는 종결된다.     

 

싫든 좋든 박대표는 유신 독재의 당사자 혹은 후계자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층이 그의 고정 지지층이라면 독재에 대한 반감 혹은 원한을 가진 층이 그에 대한 적대층이라는 사실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그와 대결하는 상대방이 유신 독재의 직접적인 피해자일 경우 그 영향이나 의미는 확대될 수 밖에 없다.

 

한대표는 이화여대 재학 중 만난 당시 서울대생  박성준씨가 결혼한지  6개월 만인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자 13년간 대전 교도소를 다니며 아내로서 옥바라지를 했다. 한 대표 자신도 1979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유신 독재 시절 조작된 간첩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거나 사형을 당한 억울한 희생자 중 하나이다.  

 

그 때 박대표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의 대행으로 공식석상의 옆자리를 지키는 정도의 단순한 의전 역할에 그쳤는지 아니면 명실공히 권력자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영향력을 미쳤는지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권력의 특성상 측근으로서 영향력을 전혀 미치지 않았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30년만에 링에 오른 셈이다.

 

또 하나, 한대표는 김대중과 노무현의 적자 혹은 후계자로서 현 집권당의 전권을 쥐고 있는 박대표와 대결하게 된다. 한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권에 영입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키운 인물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 장관, 노무현 정부에서 환경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현정권의 수사를 받다가 서거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적 비극이 현정권의 무리한 수사 때문이라고 믿는 국민의 정서가 대세인 점을 감안하면 한대표와 박대표의 대결 구도는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결 구도의 이상일 수도 있다. 오죽하면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겠는가 하는 감정은 대다수 국민들이 가지고 있으며 동정적을 넘어 동조적이기 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한대표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사장에게 5만달러,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 9억원 등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5만달러 사건은 2심까지 무죄 판결을 받았고, 9억원 사건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상태다. 한대표가 검찰에 불려다니고 재판정에 설 때 마다 많은 국민들은 현 정치 권력에 의해  핍박을 받는 약자를 보는 감정을 느꼈다.

 

혹자는 박대표가 현 정권의 실세가 아니며 오히려 대립각을 세웠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박대표는  한나라당을 재창당이 아닌 쇄신으로 이어 받고 있다. 쇄신이나 재창당이나 어차피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어서 한계가 있으며 선거를 앞두고 하는 쇄신은 어차피 선거용 쇄신으로 치부되어 진정성이 결여되어 보이지만, 어쨌든 대립각을 세웠다고 해서 가해자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핍박받는 한대표의 모습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과 맞물려 확대 재생산되었다. 자살로 마감한 노전대통령 측의 반전이 성공할까? 아니면 그를 핍박한 현정권의 방어전이 성공할까? 한대표와 박대표의 대결은 바로 이 원초적인 대결 구도를 가져왔다. 야권의 대권 후보가 누가 되든 이 대결구도의 혜택을 볼 것은 자명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무조건 약자 혹은 콩쥐를 응원하고 강자 혹은 팥쥐를 비난한다. 인간에게 그러한 심리가 없다면 드라마는 설 땅이 없고 세상은 살맛이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과 대선은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빅 매치임이 분명하다. 그런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단순한 시청자가 아니고 한표를 가진 유권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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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2주 휴가 중 1주는 고국에 다녀오느라고 보냈고 나머지 1주는 조정래씨의 한강을 읽으면서 보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매주 책 한두권은 읽었는데 돋보기를 써도 눈에 피로가 빨리와서 자연히 책을 멀리하게 되어 언제부터인가 책과 담을 쌓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10권짜리 한강을 읽으면서 책이 재미있으면 눈의 피로 쯤이야 문제도 아니구나 느꼈다.

 

소설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눈이 침침하다가 아프고, 그러다가 보이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고 쉬었다가 다시 읽으면서, “이러다가 눈이 더 나빠지지걱정을 하면서도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하는데는, 재미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거기에 무언가 감동과 가슴을 적시는 감격이 더 하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매달리기 어렵다.

 

오래 전에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을 두번 읽었다. 그때의 감동이 깊은 심연에 빠진 것 같은 무겁고 벅찬 것이었다면 이번 한강의 감동은 가벼우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감동이었다. 그 감격의 여세를 몰아 곧장 12권짜리 아리랑을 읽고 있다. 조정래씨는 한강의 말미, 저자의 후기에서 지난 20년간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쓰느라 보냈다며 이제 대하소설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대단해도 그렇지, 65세의 나이에 어찌 그런 대하소설을 또 쓸 수 있겠는가?  한강을 읽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이렇게도 인간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다.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배운 것은 물론 당시의 삶을 이렇게도 생생히 살려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다니 경이롭다.

 

태백산맥은 8.15 해방 후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시점부터 6.25가 끝나고 남북 분단이 고착되는 시점까지의 약 8년간이 시대적 배경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듯이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라고 하는 그 시대에 이 땅에 일어난 삶들을 생생하고 치열하고 적나라하게 재생해 놓은 작품이다. 55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아리랑은 일제 36년간의 강점기에 이 땅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일제의 악독한 탄압에 대해 우리의 민초들이 어떻게 저항하며 살아 냈는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나치가 학살한 유대인이 300(유대인들 주장)이라는데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우리 민족은 400만쯤으로 보고 있다며,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아리랑을 쓴 목적의 하나라고 말한다.

 

작가는 또한 같은 숫자가 죽어갔다 하더라도, 3년간의 단기간에 학살된 것과 36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학살은 이를 받아 들이는 고통에 있어서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며, 그런데도 그런 일제의 악행이 나치의 그것처럼 세계적인 정죄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우리 민족만의 치욕적이고 비극적인 역사로 남은 것을 지적한다. 이를 바로 잡고자 아리랑을 썼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강은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로 부터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김재규의 총탄으로 막을 내린 이후 5.18 광주학살과 함께 신군부가 탄생하기 직전까지의 현대사를 그렸다. 당시의 실세가 아직 살아있고 권력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 현시점에서 이토록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할 수있다는데 그 용기와 함께 강렬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특히 태백산맥이 역사를 왜곡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작가를 사상불온자로 우익단체가 고발했는가 하면 이승만의 양자가 이승만의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여 수개월간 대공수사실(속칭 남영동)과 기타 수사기관에 불려다녀야 했는데도 이에 굴하지 않고 현대사까지 그려 냈다는 것은 작가의 용기와 더불어 투철한 역사적 사명감을 실감하게 한다.

 

덧붙여, 사실을 사실대로 쓸 때 그것에 의해 정죄되는 혹은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의 고소를 견뎌내는 용기는 신문이나 방송등 언론 매체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는데 소설가에게도 해당되는 덕목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태백산맥이 먼저 나왔지만 시대순으로는 아리랑이 먼저이다.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거쳐 한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100년을 카바하는 세 작품에서 작가가 창조한 인물은 1200여명이라고 한다. 이름도 성격도 각각 다른 1200명의 인간을 창조하고 시대와 역할에 맞게 살아가게 하는 작가의 창조적 능력과 함께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료의 방대함은 생각할수록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리랑을 읽고 나면 연대 순에 맞추어 태백산맥과 한강을 다시 한번 읽어 봐야지 생각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께도 이 세가지 대하소설을 연대순으로 읽어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우리의 민족성이나 정서, 아니 우리의 몸과 얼에 새겨져 있는 DNA를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번 쯤 읽어 보아야 한다고 본다. 

저작자 표시

박근혜의원이 2년여만에 한나라당 의총에 참석했는데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아부성 박비어천가가 쏟아졌단다. 오죽하면 같은 국회 의원들이 나서서 치사한 아부성 발언을 삼가하라고 공개적인 반박을 했겠는가? 참 치사하고 굴욕적인 정치 현실이다. 어디 정치 뿐이겠는가? 치사한 아부를 일 삼으며 사는 사람 얼마나 많은가.

 

필자는 정치 뿐 아니고 어느 것이든 이득을 얻기 위해 눈치를 보거나 아부하는 짓을 천성적으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손해도 많이 보고 마음 고생도 많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세술이라고 하는 그 처세술을 따르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 왔다. 그 뿐이면 좋겠는데 더 나아가 옳으면 옳다 그르면 그르다 할 말 다 하느라 손해만 보고 살아왔다.  

 

이렇게 말하면 자존심이나 고집이 세서, 혹은 혼자 잘 났다고 남의 눈치 안보고 저 하고 싶은 말 다 하며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집에서도 그런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누구는 마음 고생 안하고 살고 싶지 않겠는가? 누구는 적당히 타협하며 반대급부를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 마음은 있는데 그게 안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필자가 호주에 오기 전에 좋은 직장이 있었다. 요즘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그에 버금가는 직장이었다. 회사(?) 내에 두 세력(?)이 있었다는데 필자는 그것도 모른채 한쪽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다른 쪽이 득세하면서 모두들 줄을 바꿔서는데, 신 세력 측이 한마디만 약속하라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 결국 떠나야 했고 호주까지 흘러왔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25년전 한국은 한번 자리를 잃으면 다시 따라 잡기가 힘든 사회구조가 아니던가? 30대 후반에 자리를 잃으면  방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그 한마디를 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겠는가. 한 두차례 술 자리까지 만들어 놓고선 마지막 순간에 그 말 한마디를 못하고 말았다.

 

언젠가 한번 말한 기억이 나는데 필자의 중학교 때 별명이 겐까도리(싸움닭)였다. 2학년을 1년 내내  매주 한두번은 싸움을 했다. 그 때는 시비가 붙으면 결투를 신청했고 이를 받아 들이면 대개 방과 후 교내 동산에서 결투를 했다. 구경꾼이 모이고 한 쪽이 항복하거나 못 일어날 때까지 싸웠다. 필자는 학교 내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다.

 

필자가 그렇게 싸움을 잘 했느냐고? 아니다. 누가 많이 맞았느냐가 아니고 누가 항복하거나 못 일어 났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거나 최소한 비겼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면 도망을 다녀야 했다. 교문 밖 써클 애들이 손 봐주기 위해 교문 밖에 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필자를 잡으려는 애들은 학교 내 주먹 쨩들이었고 교문 밖 불량 써클에 소속되어 있었다. 모두들 알아 모시는데 필자만 불복(?)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 1년 내내 돌아가며 도전을 해 왔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학교의 권위가 살아 있어서, 교문 밖 애들은 교내에 들어 오지 못했던 시절이고, 또 교내에서는 1 1의 결투만 가능했다. 여럿이서 1명을 패는 집단 폭행은 있을 수 없었다. 필자 때문에 애들 위에 군림하지 못하니 그 애들도 참을 수 없었겠지만 필자도 죽을지언정 굽힐 수가 없었다.

 

한번만 져주면 다시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회유가 있었는데 그 한번 져주는 것을 하지 못해서 1년 내내 싸우며 도망다녔다. 방과 후 필자의 가방을 집까지 배달하는 당번까지 정해져 있었다. 화해를 하고 싶었지만 항복을 할 수가 없어서 그 고생을 하며 1년을 버티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호주에 살다 보니 그런 성격 덕분에 정치도 하게 되었지만 한국 같으면 정치는 커녕 적은 사업체도 평범한 직장도 길게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시 한해를 보내면서 그런 치사한 자리에 서지 않고, 또 남의 눈치 보지않고 하고 싶은 말 다하며 살아 올 수 있었던데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결코 장한 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한해를 보내면서 내년에는 남 듣기 싫은 소리는 좀 자제하고 보기 싫은 사람도 좀 보며 살아야지 생각한다. 아부하며 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속에 있는 말 다 해서 남을 아프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해 본다. 뜻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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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특권은 무엇인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무엇이든 꿈 꿀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꿈을 꾼다는 것은 침대에 누워 천정을 쳐다 보며 그 꿈이 이루어 진 다음의 상황을 상상만으로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책상 앞에서 혹은 여러 필요한 단련 현장에서 의지와 인내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어느 교민의 아들이 얼마 전 HSC 시험을 치루면서 진학 목표가 호주의 공사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찬의를 표했다. 필자가 육사를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기분이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평소에도 비젼과 야망을 가지고 미래를 크게 설계하는 젊은이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고 행복해 진다.

 

젊은이의 야망이 꼭 군에 가서 장군이 되고 전장에 나가서 영웅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의료 분야든지 공학 분야든지 새로운 분야의 연구도 있을 수 있고 기타 여러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자체가 아름다운 인생이다. 꼭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는 길, 편안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 용기있는 삶이다.

 

필자는 조숙한 젊은이, 겉 늙은 젊은이, 즉 하고 싶은 것만 하려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는 싫어한다. “나는 그것을 싫어 해!”  왜 내가 그것을 해야 돼?” 하는 젊은이, “나는 내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어.” 그래서 인생을 편하게 즐기며 살겠다는 젊은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잡아가는 것도 아니고 경찰이 출동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공부를 잘해서 의대나 법대를 가야겠다고 하는 젊은이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이야 의사나 변호사(호주의 경우)도 넘쳐나서 꼭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을 돈이나 많이 벌어서 편하게 살려는 속물을 보는 것 같아서 보기에 썩 좋지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편견일 수 있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필자는 아직도 고 3 때의 두 친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필자의 모교에는 사관학교 지망생들만을 위한 특별반이 있었다. 일반 대학보다 입시가 빨라서 수업 진행이 빨랐다. 모두들 육사나 해사, 공사를 목표로 학과 공부는 물론 체력 단련까지 열심히 하는 그 열기는 1년 내내 엄숙하기 까지 했다. 공사 지망생 변ㅇ균과 해사 지망생 나ㅇ식이 육사 지망생인 필자와 친했다.

 

직접적인 경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친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사관학교를 지망하고 있다면 1년 후 합격자와 불합격자가 갈라지는 직접적인 경쟁 관계이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면 비행기나 선박의 그림이 있는 잡지 혹은 전문지를 들고 와서 서로 보여주며 반짝이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필자도 탱크만 보면 그렇게도 피가 끓었다.

 

셋 모두 육해공사에 합격했고 무사히(?) 졸업하고 임관했다. 필자만 빼고 모두 어깨에 별을 붙인 것으로 들었다. 그 둘과는 재학시절 휴가 때 광주에서 만나 각기 다른 제복을 입고 충장로를 활보했던 기억이 있지만 임관 후에는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다. 그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망서려진다. 참으로 치열한 삶, 그래서 아름다운 시절이었는데 다시 시작하라면 망서려지는 것은 이미 몸이 늙었고 마음도 따라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이 그렇게 치열한 삶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대리 만족 심리일까 아니면 일종의 동일시 현상일까?

 

공사를 지망한다는 그 아들이 진로를 바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괜시리 실망스럽고 맥이 빠졌다. 불러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충동이고 싶었다. 마음만 그렇다는 것이지 그게 말이 안된다는 것을 나라고 모르겠는가. 그런데 엊그제 전화 한통이 결려왔다. 20년 전에 매우 가깝게 지냈던 분들인데 그 아들이 이번에 해사를 그것도 일등으로 졸업했단다.

 

임관식에서 시상하면서  코리안 본이라고 아들을 소개할 때 눈시울이 뜨겁더라고 그 엄마는 말한다. 그 아들은 3성 장군을 목표로 한단다. 그 전화를 받은 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신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왜 이렇게 까지 엔들핀이 솟구치는지 그 이유를 참으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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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다가 스쳐 지나가면서 우연히 본 티브이의 어느 프로그램에서 남녀 수명 차이가 8년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태어나는 신생 남아의 예상 수명은 78년이란다. 남녀의 수명 차이야 별로 놀랄 일이 아닌데 신생 남아의 예상 수명이 80년이 채 안된다니 놀랐다. 내심 충격적이었다.

 

의학의 발달로 암이나 에이즈의 극복은 물론 모든 장기의 교체나 재생도 몇십년 후면 가능할 테이니 지금 태어나는 신생아는 적어도 100년은 살겠지 했는데 80년이 안 된다니, 가뜩이나 어느새 다가 온 연말을 느끼며 세월이 이렇게 빨라서야 하며 스산해 하던 기분이 오싹해진다. 오이? 그렇게 계산하면 앞으로 15년 밖에 안 남았네, 나도 모르게 그런 계산이 나왔다.

 

어디서 나온 믿음이었는지 90까지는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것도 60이 넘으면서는 무슨 계산법인지, 30년 남았네 하던 계산에서, 해가 바뀌는데도 줄지 않고 계속 30년 남았네하고 계산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15년 밖에 안남았다고 계산되니 15년을 잃어버린 것처럼 오싹하고 허전하다.

 

나이 들어가면서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되었다. 특히 지난 겨울 말농장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혼자 밤하늘을 보며 보낸 시간들은 지난 세월의 어느 때보다 가장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낀 시간들이었다. 지나 온 생을 반추하면서 죽음도 자주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도 웬일인지 남은 여정은 별로 가깝게 느끼지 않았나 보다.

 

오늘 아침 들은 평균 수명과 그래서 계산된 남은 수명에서 오싹한 것을 보면 나만은 언제나 30년이 남았다는 생각을 한 것이 분명하다. 작년에 이스트우드에 세번째 사무실을 연 것도 남은 여정이 아직 창창하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세번째 사무실은 필자에게 단순히 사무실 3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프랜차이스 회사를 가지고 싶다는 꿈이 있고, 최소한 스트라타 회사를 해보겠다는 계획이 있다. 하나는 가능성이 별로 크지 않아서 꿈이라고 보지만 다른 하나는 구체적으로 시도하기를 수차례 했던만큼 여건만 되면 언제나 실현 가능한 계획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무실 3개의 의미는 최소한 스트라타 회사 설립을 위한 첫 걸음이다.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필자는 아직도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추구하고 있으며 어지간한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예상 가능한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피가 펄펄 끓는 젊은이가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필자는 아직도 혼자 말타기를 즐긴다. 그리고 전속으로 달리기를 즐긴다. 이른 새벽 혼자 말을 타고 길거리로 나서면 모든 순간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다. 어느 순간 어느 집에서 개가 튀어 나올 수도 있고 울타리 안에서 뛰어 올 수도 있다.  파크랜드에 올라가면 캥거루나 여우가 튀어 나오기도 하고 풀숲에서 갑자기 새떼가 날아 오르기도 한다.

 

말은 겁이 많아서 바람에 비닐 봉지만 하나 날아 올라도 놀란다. 말이 놀라면, 특히 달리다가 놀라면 대개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 리스크가 없다면 말타는 것도 벌써 시큰둥해졌을 것이다. 골프도 마찬가지이다. 치는대로 원하는 곳에 날아 가고 퍼팅마다 쉽게 홀컵에 들어간다면 곧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필자만의 생각인가?

 

어쨌든 필자로서는 순간 순간 그런 리스크가 있기에 말 등에 오를 때마다 긴장하게 되고, 그런 위기를 넘길 때마다 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6년째 말을 타면서도 주 4회 타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생활에 활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 젊은데(?) 갑자기 남은 여정이 기껏 15년이라고 생각하니 오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년 연말은 오랫만에 고국에 다녀 올 계획이다. 연말은 추운 겨울에 눈이 하얗게 쌓인 뜰이나  얼어붙은 길바닥에서 맞아야 연말 기분이 난다. 호주에 온지 23년째, 더운 크리스마스에는 익숙해 있는지 모르지만, 일찍 어두워지는 겨울 밤이 없는 연말, 불빛이 얼어 붙은 거리를 걸어 보지 못하는 연말은 연말다운 기분이 안나는 것이 사실이다.

 

오랫만에 고국에 가서 얼어 붙은 몸으로 연말같은 연말을 느껴 보아야겠다. 그러면서 남은 여정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겠다. 같은 것에도 연말에는 좀 더 감성적이 된다. 앞으로 남은 여정의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평균치로보아 15년 밖에 안 남았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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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방호한 문하영 대사가 기자 간담회에서 밝힌 바에 대해 설왕설래 말이 많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문대사의 발 빠른 방호에 대해 내심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발효된 재외 동포 참정권이 가져온 특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시드니 사회에 한인 여성 매춘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뜻있는 교민이면 모두들 수치스러워 한다. 태국이나 필리핀 여성들이 주류였던 호주내 매춘녀가 한인녀로 대치되기 시작한지 몇년만에 이제 한인 매춘녀가 대세가 되는 추세이다. 이에 대해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면 애족심이나 민족적 자존심이 결여된 사람이다.

 

한국 고아들의 해외 입양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민족애이며 민족적 자긍심이다.  6.25후 전쟁 고아들을 입양해 보낼 때는 그렇더라도,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는 조국이 아직도 자국의 영유아들을 해외에 입양한다는 사실이 못내 수치스러운 것이다. 거기에 대고 입양이 뭐 불법이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행여라도 시드니 동포사회가 시드니 내 한인 여성 매춘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것은 매춘이 합법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세계의 하고 많은 민족 중에 한인 여성이 매춘의 대명사가 되어 가는데도 그게 어째서?”라고 한다면 그는 민족을 사랑하거나 자랑스러워 하는 자가 아니다.  

 

시드니에 살고 있는 동포들 대다수는 시드니의 한인들이 잘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고 잘 못하는 일은 부끄러워 한다. 자랑스러운 일이 호주 신문에 나면 우쭐해하고 더러운 일이 호주 사회에 알려지면 수치스러워한다. 우리 민족 뿐 아니라 레바니스도 차이니스도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서 한인 매춘이 시드니에서 언론에 오르 내리고 확산되어 갈 때, 이에 대해 이유야 어떻든 또 성과가 크든 적든 고국 정부에서 발빠르게 대응하고 나선 것은 시드니 거주 교민들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에 대해 시시비비가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워킹 할리데이 제도를 악용하여 매춘 여성의 호주 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뒤늦게나마 정부로서 할 수 있는 조치 즉 여권 발급 제한강제 귀국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니 다행이다. 말로만 아닌 실질적인 성과가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더 고무적인 것은 빚을 구실로 한 성매매 강요 등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강화하기로 호주 정부와 합의했다는 발표이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잘 한 일이다. 홍보나 전시에만 그치지 말고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계속적인 추진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달 초 호주 주요 일간지에 대서특필 되었던 사건이 있다. 여권을 빼앗기고 감금되어 성노예가 된 한인 여성을 호주인 남자 친구가 구출하러 업소에 달려 갔다가 중국인 폭력배에게 철봉으로 맞아 죽었는데, 불법 칩입하다 맞아 죽었다며 정당방위로 일단락되었다가 다시 수사를 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필자는 워킹 할리데이를 악용하여 호주로 원정 온 수백 수천명의 직업적 매춘녀 보다는 위홀이나 유학생으로 왔다가 일시적 실수나 충동으로 인해 성매매의 굴레로 떨어져 몸부림치는 한두명의 순진한 피해자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보고 있다.

 

직업적 매춘녀야 어차피 불법인 고국보다 합법적인 호주에서 외화를 버니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경험 삼아 혹은 영어를 배우겠다고 왔다가 아차 실수로 성노예가 되어버린 우리의 딸들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이는 우리 모두 가슴을 쳐야 할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는 빌미가 되는 광고 매체를 비난했다.

 

그런 광고가 없었다면 길을 몰라서도 그런 길로 가지 않았을 우리의 딸들이 그 광고 때문에 단 하나라도 그런 길로 가서 평생을 망쳤다면 그 죄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문하영 대사의 그런 잡지 폐간 운운은 당연한 분노의 표시라고 본다. 그 정도의 공분도 없는 공직자라면 그에게서 무슨 성과를 기대하겠는가?

 

문대사가 그런 잡지를 폐간시키겠다고 했다면 표현이 지나쳤다. 그러나 그런 발언은 아니었지 싶다. 호주 내에서 발행되고 있는 매체는 호주 정부도 발행 허가나 취소권이 없다. 하물며 고국 정부가 폐간시키겠다고 했겠는가. 한인 커뮤니티가 나서서 폐간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들린다. 그렇다면 필자는 100%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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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석 국회의원이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이라는 개그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개그맨 최효종을 집단모욕죄로 고소했다고 한다. 그 뉴스를 들은 네티즌들의 반응 중 가장 많은 수가 누가 개그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최효종 본인도 농담인 줄 알았단다. 강의원도 변호사인데 설마 최효종을 유죄라고 보지는 않았겠지? 

최효종은 개그콘서트의 사마귀 유치원이라는 코너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집권당 수뇌부와 친해져 공천을 받고, 여당의 텃밭에서 출마해야 한다. 출마 후에는 생전 먹지 않았던 국밥도 한번에 먹고, 상대방 후보의 약점은 개처럼 물고 늘어지면 당선된다고 말한 것을 놓고 국회의원을 집단 모욕했다는 혐의로 고소했다는 것이다.

소장을  강용석 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아나운서 지망생 여대생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아나운서를 하려면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느냐? 무슨 무슨 여대는 명문이라선지 벗고 다 주는 그런 것은 잘못하는 것 같더라식의 발언을 해서 성희롱으로 비난을 받다가 아나운서들로부터 아나운서 집단 모욕 혐의 고소를 당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아나운서 집단 모욕죄인지, 성희롱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면서 여대생들을 무고 혐의로 고소해서 오히려 무고죄를 받았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했다는 괘씸죄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유죄가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의원 자격을 박탈 당할 위기에 있는데 "만일 최효종의 국회의원 집단 모욕이 무죄라면 자신의 아나운서 집단 모욕도 무죄"라는 주장을 위해 고소한 것으로 보인다.   

 

참 한심한 일이다. 국회의원이 일개 개그맨을 상대로 누구나 웃음으로 받아들일 만큼 전혀 이상한 생각이 들지않은 개그를 가지고 고소를 한 것도 한심하고, 그 이유가, 자신이 아나운서 집단 모욕 혐의로 유죄 판결 받은 것과 연계하여, 혹은 불만의 표시로 고소를 했다는 것도 한심하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 아나운서 집단모욕이라는 죄목의 유죄 판결도 한심하기는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벗고 다 주어야 한다고 신문이나 방송에 대고 떠든 것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리플렛이나 팜플렛하나 만든 것도 아니다. 식당에서 몇몇이 밥 먹으면서 농담 삼아 한 얘기이다. 공인으로서 잘한 짓은 아니지만 어찌 의원 뺏지를 빼앗을만큼 큰 죄란 말인가.

 

이놈의 사회가 정치계나 법조계나 방송계나 모두 코미디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여대생들하고 밥 먹으면서 다 주어야 한다고 음담하는 국회의원이나, 그것이 아나운서를 집단적으로 모욕했다고 고소하는 아나운서들이나, 그것이 유죄라고 판결하는 판사들이나, 그렇다고 또 개그맨을 고소하는 국회의원이나 모두 모두 개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국회의원이나 개그맨이나 모두 인기를 먹고 사는 스타여서 같이 노는 모양이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하고 사람을 웃기던 코미디언 이주일도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주일이 1992 국회의원이 되자 개그맨 전유성이 "드디어 전직 코미디언이 국회의원이 됐다. 전직 정치인이 코미디언 되는 세상도 왔으면 좋겠다"했더란다. 이제 그런 세상이 온 것인가?  

 

이주일은 정치판을 떠날때 "코미디 배우고 갑니다"라고 했다던가? 이주일 같은 일류 코미디언이 코미디를 배웠다니 정치판이야말로 대단한 코미디 판이 아닌가? 하기야 국회에서 부딛치고 넘어지고 던지고 받는 국회의원들의 몸개그야 말로 이주일의 몸개그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지구를 떠나거라나가 놀아라라는 유행어를 만든 개그맨 김병조모임에서 한나라당 전신인 민주정의당을 "정을 주는 ", 야당인 통일민주당을 "고통을 주는 "이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방송을 접은 적이 있다. 누가 보아도 웃자고 한 말장난이다. 그것을 트집잡아 야단을 치는 정치인들 그거 웃기자고 한 짓 아니었을까?  

 

전두환 대통령 시절 그분이랑 대머리가 닮았다고 방송 출연을 못한 연예인도 있었다든가? 세상에 참으로 유치 찬란한 코미디이다.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 두사람을 혼동할 사람은 없다. 그 탈렌트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을 보고 ? 대통령이 웬 드라마 출연?” 이렇게 놀랄 사람 하나도 없을텐데, 그 탤런트를 가발 씌워 나오게 하다가 그나마도 못나오게 했다면 세상에 그런 코미디가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사회 전반에 걸친 코미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우리 민족이 원래 해학이 뛰어나고 생활 속에서 웃음의 철학을 즐기던 민족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요즘 정치인들이 개그맨 소질을 가진 분들이어서 그런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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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4 11일 치러지는 제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재외선거인 등록 신청이 지난 일요일(11 13)부터 시작되었다. 내년 2 11일 까지 등록을 받는다고 한다. 한민족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해외 동포들이 고국의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재외국민선거가 이제 그 막을 올린 것이다.

이민자를 포함하여 해외 거주하는 유권자가 220만이라니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부 지역 국회의원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대통령의 당락에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무시 못할 숫자이다. 그러다 보니 재외 동포들의 표심을 잡으려는 고국 정치권과 거기에 줄을 대려는 해외 동포 사회의 철새들이 서로 손을 잡느라 야단이다.

고국 정치권에서는 미국 교민사회를 제일 중요한 타켓으로 보는 모양이다. 유권자 수도 제일 많고 또 고국 정치에 적극적인 인사들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재외 동포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가장 열렬히 주장한 곳도 그 곳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잡음이 가장 크게 일고 있는 곳도 그 곳이다. 호주도 관심권 중의 하나이겠지만 그리 큰 비중은 아니리라 본다.

그래서인지 호주에는 큰 잡음이 아직 들리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서로 자기가 크다고 혹은 자기 단체가 크다고 세를 과시하며 정치권에 줄대기 경쟁을 하다보니 교민 사회가 분열되고 있다. 표를 몰아 줄테니 비례 대표 자리 하나라도 달라고 노골적인 흥정을 벌이는 인사도 있고, 경쟁자(?)를 비방하는 현상도 일어난다.

그래서 이웃끼리 분쟁이 일고 친하게 지내던 사이가 원수가 된다. 재외동포 투표권이 결국 잘 살고 있는 해외 동포 사회에 분열과 분쟁을 가져 온 꼴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재외동포 투표권인가? 해외동포들도 내 동포이니 당연히 고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과연 그것이 진짜 이유인가?    

아니면 재외 동포들의 표심을 잡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어느 정당 혹은 어느 정치권의 흑심 때문인가? 해외는 물론 고국에서도 이에 대해 찬반양론이 팽팽했었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 각계 각층에서 찬반 논쟁이 뜨거웠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해외 동포들을 고국의 정치판에 끌어 들이는 재외동포 투표권에 대해 거부감을 느껴왔으며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그 반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교민사회의 분열이었다. 어디나 할 것 없이 교민사회는 분열되거나 파벌 싸움이 있는데 그 이유는 100% 교민회장이나 기타 무슨 단체장 선거가 원인이다.

 

형님 동생하던 사이가 선거 때문에 원수가 되어 육두문자가 난무하고 심지어 주먹다짐까지 오고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교민사회 내의 조그만 단체장 선거 가지고도 그 난리인데 고국의 정치권에 줄을대서 떡고물이라도 챙기려는 선거판이 얼마나 치열할지 안 보아도 비디오가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반대를 했었다. 그리고 그 현상이 미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주지역 뿐이겠는가? 시드니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시드니에서도 이미 모 정당에서 시작을 했다. 이제 그 상대되는 당이 상륙할 것이고 그러면 세를 과시해서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아 보려는 인사들이 설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서로 부딪치게 될 것이다. 시드니 교민사회가 또 얼마나 시끄러워질 것인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반대하는 또 하나 이유는 이민가서 살고 있는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의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잘 살도록 장려는 못할 망정 고국 정치에 개입하도록 뒷덜미를 붙잡아서 좋을게 없다는 것이다. 시집 간 딸은 시집 일에 몰두하도록 놓아 두어야지, 친정 일에 개입하도록 자꾸 불러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민간 동포들은 이민가서 살고 있는 그 나라에서 사업도 하고 정치도 하고 자리를 잡아야 고국에 힘이 된다. 고국이 강하고 잘사는 나라가 되면 해외에 나가있는 동포들이 힘을 받고 해외에 나가있는 동포들이 그곳에서 잘 살고 잘 되면 고국에 힘이 된다.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동포들이 외국의 주류사회로 들어가는데 힘이되고 보탬이되도록 고국 정치나 잘 할 생각은 안하고, 이민간 동포들의 표라도 잡아 볼까 하는 위정자들 때문에 해외 동포들이 고국의 정치권에 줄을 대 볼까 하느라 현지의 주류사회에 들어가는데 힘을 다 쓰지 못하고, 또 그 바람에 서로 갈라져 싸우게 되니 이거 참 민족의 백년대계를 생각할 때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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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상우회가 시티에서 매년 주최하던 구정 축제 행사가 내년 부터는 시드니 시내 도로 일부의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하루 종일 치러진다고 한다. 시티 변두리에서 유럽계 일부 가 도로를 막고 자기네 민족 행사를 치르고 있다고 하는데 시티 중심가의 도로를 막고 대대적으로 치러지는 행사는 없다고 한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이민 초창기부터 한인 타운으로 자리를 잡아 온 캠시에서 중심거리인 비미쉬 스트리트를 막고 하루 종일 한국 음식 축제(나중에는 한국 문화 및 음식 축제로 개명)를 시작한 것은 필자가 캔터베리 시의원에 당선된 1999년부터이다. 2003년까지 매년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왔는데 2004년 명칭을 캠시 음식 축제로 바꾸면서 사라져 버렸다.

 

2004년 당시 캠시음식축제는 한인사회가 보이콧트를 할 것이라고 필자가 시의회에서 한 발언이 지역 신문들에 연이어 대서특필 되자 정치권에 큰 반향이 일었다. 어느 소수 민족이 지방정부든 주 정부든 또 크든 작든 정부의 행사를 공식적으로 보이콧트 한다는 것은 정치권에서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당시 한인회가 보이콧트 철회를 일주일만 늦추었어도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었을텐데 생각할수록 아쉽고 안타깝다. 한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현역 시의원인 아들이 기회가 되면 반드시 한국음식축제를 다시 살리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필자가 얼마나 안타까워 하는지 짐작이 되리라 본다.

 

그런데 시티 상우회가 시드니 시내에서 일부 도로를 막고 대대적인 한국적 설 행사를 갖는다니 얼마나 반갑고 좋은지 모르겠다. 대리 만족이라고 해야 하나?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심정으로 봐라!”하고 외치고 싶다. 무슨 말인지 독자들은 잘못 알아 듣겠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단지 필자만의 대적 심리가 있다는 정도만 밝혀둔다.

 

그래서, 송석준 시티 상우회장의 쾌거에 찬사를 보내며 개인적으로 고마운 생각까지 든다. 덧붙여 시티에 한국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장승을 세우려고 추진하고 있다고 들린다. 아직 승인이 난 것은 아니지만 승인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승인이 나면 아무래도 송회장께 술이라도 한잔 사야할 것 같다.

 

때 마침 다음 주에 캠시 동구 밖에 장승이 건립된다. 필자가 7년 전에 시의회에서 발의하여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성사되지 못하다가 김병일 한인회장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는 것이다. 김병일 회장께도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낸다.

 

김회장께는 곱으로 감사를 해야할 것 같다. 김회장이야말로 시티상우회를 창립한 당사자이며, 시티상우회 고문으로서 송석준 회장과 손발이 잘 맞는 것으로 들린다. 필자가 캔터베리에 장승을 세우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사실 시티에서 한국적 조형물을 추진하다가 중국계 힘에 밀려 좌절됐다는 말을 듣고 필자가 시의원으로 있는 캔터베리에라도 세우자 해서 추진한 것이다.

 

그러니 시티에서 맛 보았던 좌절을 만회할 수 있는 시티 상우회를 만들고, 이제 시티에 조형물을 추진하는데 일조할 뿐아니라 캠시에 세우려다 미루어졌던 장승을 실제 세우기까지 하니 이중으로 필자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곱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시티 조형물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장승이 아닌 다른 것으로 추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캔터베리(캠시가 있는 시)에 세웠으니 같은 것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시티에 적합한 조형물이라면 여러개 여기저기 세운다고 안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장승은 시골 마을의 동구 밖에 세워야 의미가 있다. 시티의 건물 사이나  빌딩 앞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기왕 세우려면 국제적 관광 도시이며 세계 5대 미항이라는 시드니의 명성에 걸맞게 우리의 우수성을 세계에 들어낼 수 있는 조형물이 어떨까 싶다. 우리의 민속물이라는 의미나 전통적 상징물이라는 의미를 벗어나서 우리의 우수성과 역사적 우월성을 보일 수 있는 조형물이 좋지 않겠는가.

 

예를 들자면, 이충무공의 거북선 모형물도 좋고, 한글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조형물(한글탑)도 있을 수 있고, 전통적 청기와 조형물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불가사의한 팔만 대장경의 모형물도 있고, 남대문이나 경복궁의 모형물도 있을 수 있다.

 

기왕 세운다면 캠시에 세워지는 장승보다는 더 의미있고 차원이 높은 조형물을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찌되든 현재까지 이루어 놓은 일만 해도 찬사를 받을만 하다. 김병일 한인회장과 송석준 시티 상우회장에게 한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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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친께서 승주군수 여수시장 진도군수 나주군수 해남군수 함평군수 완도군수 고흥군수 광양군수 등 두루 돌아 다니시는 동안 필자는 해남의 조부모 밑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아버지 임지따라 전학다니면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조부모께서 우기셨다는데, 지금 손자를 본 필자 생각으로는, 장손을 기르고 싶은 조부모의 핑게(?)였지 싶다.

 

평생 남 앞에 맨발을 보이신 적이 없던 할아버지, 한 여름에도 집안에서 한복을 갖춰 입고 계셨던 할아버지, 어린 장손이 조부님이라고 호칭해야 했던 할아버지로 부터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은 상놈과 양반의 차이였다. 공무원 즉 관리 아니면 장사치나 기술자나 다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양반의 몸가짐이나 정신이 상놈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훈육을 받았다.  

중학교 진학하면서 광주로 이사와서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같이 사시다가, 필자가 육사 1학년때 돌아가셨는데, 아마도 필자를 무관(군인이니까)쯤으로 보아, 손자가 아들 대 보다는 못하다고 느끼시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선친의 형제가 모두 공무원(문관)이었으며, 그 사촌들 즉 할아버지의 조카들도 모두 공무원이셨으니 말이다.

군에서 예편할 때까지 평생 사회생활을 해 본 경험이 없던 필자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훈육받은 탓인지 아니면 주변에 공무원만 보여서인지 장사나 기술에 대해 천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반면 교사나 교수에 대해서는 양반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정치인에 대해서도 사대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치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는 게기가 있었다. 선친께서 시장 군수를 그만 두신 후  국회의원의 꿈을 꾸셨는데, 필자가 서울에 있을 때 광주에 사시던 선친께서 출마 관계로 당직자들을 만나러 상경하실 때 마다 꼭 필자를 동행했다. 길 안내겸 보좌관 겸, 또 장래를 위해 배우게 할 겸 여러가지 생각이셨을 것이다.

그렇게 정치권 주변을 맴도는 수년 동안 정치의 이면에 찌들어 있는 치부를 속속들이 경험했다. 접촉하던 당은 여당도 있었고 야당도 있었는데, 공무원 30년의 선친도 정치꾼들 앞에는 천진무구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매번 헛물만 켰는데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었다.

선친께서는 정치의 꿈을 접으시고, “내 대에 뿌린 씨를 네 대에서라도 거두겠지” 하시며 “쌓아 놓은 공덕이 어디 가겠느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사무친 한을 스스로 푸시는 것인 줄 아는지라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절대로 정치는 안합니다”고 외쳤다. 필자 또한 한이 맺혔으니까. 당하는 당신 뿐 아니라 옆에서 보는 아들도 한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르실까 했었다.

선친의 공덕 때문인지 어쩌다 보니 호주에 와서 정치에 몸 담고 아들까지 대를 물려 현역 시의원으로 있지만 한국적 풍토였다면 결코 정치에 몸 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들이야말로 장사치(?)보다 더 못한 상놈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교수에 대해서는 양반이라는 개념보다는 학자 혹은 선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 찾아와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을 때 왕이 가리고 있던 햇볕을 원한다고 했던 그리스 어느 철학자의 고고한 인격이나, 왕이 삼고초려를 해도 권력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던 우리 선비들의 학과 같은 기개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 교수들이 선거철만 되면 장사치보다 못한 정치권을 맴돌고 앞 다투어 충성 경쟁을 하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폴리패써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렇게나 많은 교수들이 권력에 줄을 대는 줄 정말 몰랐었다. 처음부터 장황하게 필자의 성장 배경을 늘어 놓은 이유는 필자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호주에 와서 호주 목사를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양반은 없는 줄 알았다가 호주 목사들을 보며 아직도 진짜 양반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신앙 이전에 양반이었다. 20여년전 일이다. 그렇게 신앙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한국 목사들을 접하면서 호주 목사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많이 놀랐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요즘 일부 목사들 해도 너무한다. 얼마 전에는 기독교 정당을 만들겠다고 몇몇 목사들이 설치더니 지난 주에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박원순 후보를 빗대  “사탄 마귀” 운운하며 찍지 말라고 강대상에서 외쳤단다.  

교인으로서 이런 목사를 볼 때마다 화가 난다. 폴리페서처럼 폴리스터라는 말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화가 나서 글을 시작했는데 더 이상 심한 말은 삼가한다. 그런 목사들을 보며 가슴 아파 하시는 참다운 목사들이 한국에도 몇백배 많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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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서는 현역 대통령의 아들이 임기 중에 고발 당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 보다 더 웃기는 것은 고발당한 내용의 치졸성이다. 실명제를 어겼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을 사용하지않고 아들의 이름을 사용했다가 말썽이 되자 이대통령 왈 “그래? 그럼 내 이름으로 바꿔라” 그랬다던가? 이거 웃어야 할지…

아들을 고발했지만 사실 실명제를 어긴 것은 대통령 부부이다. 아들이 주체가 되어 자기 이름을 차명해 준 것이 아니고 대통령 부부가 주체가 되어 아들 이름을 차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차마 현역 대통령이나 영부인을 고발할 수가 없어 애꿎은 아들을 고발한 것이다. 본인이 고발당한 것 보다 훨씬 더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실명제 외에 고발 당한 죄목이 하나 더있다. 공금을 유용해 사저 부지 구입에 보탰다는 의혹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고발을 당했지만 이 또한 대통령 자신을 고발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가장 흔한 공급 횡령 방법 중 하나가 공금으로 공공 물품대를 지불하면서 개인적인 것 구입에 섞어 쓰는 방법이다. 참으로 치사한 짓이다.

몇백억 사재를 사회에 환원했다는 분이, 아니 일국의 대통령이 고작 몇억 때문에 공금으로 경호시설 부지를 구입하는데 거기 얹어서 사저부지를 구입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치사한 일인가? 2백만원짜리 월급쟁이가 공금으로 공적인 물품을 구입하면서 거기에 얹어 2만원짜리 개인 물품을 구입한 것보다 더 치사하다. 금액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가슴(통)의 크고 작음을 말하는 것이다.

때마침 42년간 리비아를 독재로 통치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은 카다피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반군에게 곤욕을 치르다 총에 맞아 죽은 다음, 시신마져 정육점 냉동고 바닥에 눕혀져 구경꾼들의 인증샷에 사용되고 있는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목숨을 구걸했다는 보도이다.

목숨을 살려주면 금이나 돈을 주겠다고 천문학적인 숫자를 제시했다는데, 동영상에서 정작 목숨을 구걸한 모습은 없다. 대신 마지막 남긴 말 중에 “너희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찌 알겠느냐!”고 일갈했다는 증언이 필자의 뇌리에 남는다. 끌려다니며 흉기로 항문을 찔리는 등 고문과 구타를 당하며 공포에 떨 수는 있다. 인간이니까.

독재자들의 말로를 보면 자살한 경우도 있고 망명한 경우도 있다. 도망다니다가 자연사한 경우도 있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된 경우도 있다. 카다피는 수도 트리폴리가 함락된 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곧바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력을 이양하면 살 수 있는데도 싸우다가 최후를 맞을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런 그가 목숨을 애원했다는 것은 믿고 싶지 않다.

만약 목숨을 애원했다면 그는 역사상 가장 치사한 독재자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끝까지 당당했다면, 비록 세불리하여 체포당했으며 반군(자신의 입장에서는 폭도)들의 조롱과 구타, 사후 시신마져 벌거 벗겨진채로 정육점 냉동고에 방치되어 구경꾼들의 인증샷에 이용되었지만, 이는 비참할지언정 치사하거나 비겁한 말로는 아니다.

만약 끝까지 당당하게 맞서다가 죽었다면 그런 시신을 모욕한 반군 지도자들이 오히려 비열하다. 특히나 목숨을 애원했다고 폄훼하는 짓이야 말로, 카다피에게 있어서는 시신을 모욕한 것보다 더 비열한 모욕일지도 모른다. 옛날 삼국지나 일본의 전국시대에도 체포된 적장을 모욕하지 않고 자결하게 하는 것이 승자로서의 명예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게이트를 보며, 같은 시기에 터진 카다피의 죽음이 필자의 뇌리에 연계되는 것은 왜일까? 42년간의 독재가 어찌 용서 받을 수 있는 범죄이겠으며, 고작 몇억을 편법으로 전용한 것에 어찌 비교되겠는가? 죄질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고 비교될 것이 전혀 없는 두가지가 왜 필자의 뇌리에는 연계되는 것일까?

아마도, 필자에게는 치사하다는 것과 떳떳(?)하다는 것의 차이를 먼저 보는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독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범죄 보다는 사람의 됨됨이나 통의 크기를 먼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카다피에게는 시신이 모욕을 당하는 것 보다,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는 것이 더 수치스럽게 느껴질 것이라는 생각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자신의 말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고 몇푼어치의 이득을 위해 자신을 팔아 넘기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현직 대통령이 사저부지 구입을 하는데 몇억 싸게 사려고 경호 시설 부지 구입과 연계했다는 것이 필자라면 참으로 수치스러울 일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쯔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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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난 일요일 새벽 비가 쏟아 지는데 말을 타고 거리로 나섰다. 출발할 때는 비가 잠시 멈추었을 때였다. 비가 오고 있을 때 말등에 오르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달리고 10분만 지나면 비 따위 전혀 문제가 안된다. 아니 오히려 시원하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 날도 별 생각없이 말을 타고 농장을 나섰고 곧 비가 쏟아졌다.

농장에서 약 20분 정도 마을을 지나가면 파크랜드가 나온다. 파크랜드 입구에서 산을 넘어 갔다가 다시 입구까지 돌아오는데 말 코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도록 힘껏 달려 약 20분 거리이다. 따라서 농장에서 파크랜드를 한바퀴 돌아오는데 약 1시간 거리이다. 운동삼아 달리는데 황금 비율 코스이다.

마을은 전형적인 호주식 농촌 마을이다. 소나 염소, 양이나 기타 전혀 보지도 못했던 동물들이 방목되어 있는가 하면 비닐 하우스나 야채들이 들어 차 있기도 하다. 집들은 거의 현대식 호화 주택들이다. 파크랜드에도 산책로를 따라 양쪽에 소들이 방목되어 있어서 가운데 난 길로 말을 달리면 소들이 울타리 안쪽에서 따라 뛰거나 놀라 흩어지기도 한다.

보통, 비가 오는 날은 말을 타지 않는다. 비 오는 날 뿐 아니라 비가 온 후 며칠은 땅이 미끄러워 위험하기 때문에 취미나 운동삼아 타는 사람들은 아예 타지 않는다. 그런데 필자는 800 에이커의 농장에 말을 하숙시킬 때부터 비와는 상관 없이 탔기 때문에 비에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비에 대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농장에 말을 하숙 시킬 때의 일이다. 여러 동산을 돌아 오르 내리며 말을 달리는데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이미 소나기가 몇차레 지나갔다가 어느 순간에는 해가 잠깐 내려 쬐기도 하던 날이었다.

산 밑에서 산마루로 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동아줄같이 굵은 빗줄기에 말이 달리니 눈을 전혀 뜰 수 없다. 말도 놀라 마구 달리는데 이럴 때 속도를 줄이려고 하면 오히려 위험하다. 마냥 가속되는데 어느 순간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에 빠지면서 산꼭대기까지 내달았다. 길어야 3-4분인데 그 때 그 쾌감은 아직도 발끝이 스멀거릴 만큼 강렬했다.

하숙 농장에서는 혼자 말타고 나가는 것을 만류한다. 혼자 말을 타고 나갔다 떨어져서 다치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하고 3일 만에 발견된 적이 있었단다. 800 에이커에 숲이 깊어 한적한 곳에서 떨어져 고립되면 며칠이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는가?

필자는 이른 새벽 혼자 타는 것을 좋아한다. 새벽에 타는 사람이 없어 혼자이기도 하지만 특히 비가 오는 날 같이 탈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필자는 언제나 혼자 말을 즐긴다. 주말 같은데 여러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떼를 지어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페이스를 맞추느라 싫컷 달리는 속도감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자만의 농장을 가지고 있으니 어차피 혼자 탄다. 그런데 이날 아침 문제가 생겼다. 새벽에 일하러 나가려던 트럭 운전사가 비에 주춤거리며 집 앞에 서 있다가 빗속을 달려오는 필자를 본 것이다. 집에서 10미터 밖에 안되는 거리에 있는 트럭까지도 가지 못할 만큼 비가 오는데 말을 타고 지나가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던터라 아침 인사 정도로 알아 먹었다. 그런데 몸짓이 심상치가 않다. 무심코 지나쳤다가 파크랜드를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하니, 말에게 너무 심하지 않는가 하는 항의성 외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이른 새벽에 말을 달려 지나가니 동물 학대 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돌아오면서 보니 트럭과 함께 사라지고 없다. 찜찜하다. 처음 볼 때 한마디 해명이라도 하고 지나갈 걸 하는 후회가 된다. 말은 비가 와도 들에서 풀을 뜯는다. 마구간에서 건초나 씹고 있는 말이라면 모를까 들판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말은 비가 온다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괜히 사람들이 과잉보호를 하느라고 옷을 입히고 비를 가려주고 야단일 뿐이다. 그런데 동네방네 다 돌아다니며 해명할 수도 없고, 이거 비올 때 계속 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제 비속을 질주하는 쾌감은 영원히 포기해야 할까? 목하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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